깨달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한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깨달음이 무엇인지 와 닿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에 대하여 한 구절로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금요강독모임에서
7월 첫번째 금요강독모임에서 독송한 경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포살의 경’에서 고귀한 님으로 지내는 수행승에 대한 것이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고귀한 님으로서 지내는 수행승이 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고귀한 님으로서 지내는 수행승이 있다.”(A4.190)
경에서는 네 가지 법수로 되어 있다. 네 가지 사항이 있는 것이다. 하늘사람의 지내는 수행승, 하느님으로 지내는 수행승, 부동의 님으로 지내는 수행승,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님으로 지내는 수행승이다. 각각 색계선정, 사무량심, 무색계선정, 그리고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네 가지 부류의 수행승에서 가장 수승한 것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이는 ‘고귀한 님’이라는 명칭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고귀한 님은 ‘ 아리야빳따(ariyappatta)’를 번역한 것이다. 아리야는 예류자 이상의 성자를 말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성자’라고 번역했다.
색계선정과 무색계 선정을 닦아도 색계와 무색계에서 지낸다고 해도 사성제를 철견하지 못하면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무량심 수행을 하여 하느님(brahma)으로 산다고 해도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으면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하느님으로 산다고 해도 사성제를 철견하지 않아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지 못하면 윤회하게 된다. 빛나던 하느님도 돼지우리에서 꿀꿀거릴 수 있음을 말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무엇일까? 선종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인 것을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나는 본래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깨달은 존재임을 증명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본래 깨달은 나를 찾는 수행을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이와 다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다. 이는 명백하다.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
초전법륜경을 보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선언한 장면이 있다. 부처님은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anuttaraṃ sammāsambodhiṃ)’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다.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앞서 언급된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S56.11)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 부처님의 깨달음을 위없는 깨달음이라고 할까? 그리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할까? 그것은 보편적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깨달음이다.
꼰당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을 때 알아들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이 순간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라고 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은 놀랍고 전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면 경이롭고 놀라운 일이 발생된다. 보살이 입태 했을 때, 그리고 보살이 태어 났을 때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우주 끝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꼰당냐가 부처님의 깨달음을 처음 이해 했을 때 역시 일만세계가 진동하고 광대한 빛이 우주 끝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다. 맛지마니까야에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을 보면 보살이 입태하고 탄생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가 잘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이는 선종에서 말하는 본래부처를 깨달은 것과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명백히 사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이는 사성제 중에서도 고성제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안 것이다.
세상은 즐거운 것일까? 괴로운 것일까? 어떤 이들은 세상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세상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반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은 세상은 괴로운 것이다. 이를 팔고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설한 팔고에 대하여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괴로움을 성스런 진리라고 했다.
괴로움에 대하여 뼈져리게 알면
어떻게 괴로움이 성스런 진리가 될 수 있을까? 괴로움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괴로움을 성스러운 진리로 받아 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하여 뼈져리게 알면 괴로움은 성스런 진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괴로움을 진리로까지 여기지 않는다. 괴로움을 진리로 여길 정도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왜 그런가? 괴로움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으로 설명했다.
전재성 회장에 따르면 “괴로움을 보는 자만이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괴로움을 보지 못하면 진리를 볼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누군가 “즐거움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깨달은 사람은 즐거움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일체개고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즐거움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말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S35.136)라는 게송이 있다.
왜 결과를 먼저 알아야 할까?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는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이 세상은 즐겁다’라고 했다면 즐거움의 진리를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으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모든 것이 괴롭다는 사실을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왜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말하지 않고 괴로움의 결과를 먼저 말했을까? 이는 괴로움은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사성제에서 괴로움은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새로운 원인은 만들 수 있어도 결과로서 나타난 것을 바꿀 수 없다. 지금 괴롭다면 괴로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업의 과보가 익어서 결과로서 나타난 괴로움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 괴롭다고 하여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는 바꿀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사성제에서 결과에 해당되는 고성제가 먼저 나온 것은 이유가 있다. 이는 괴로움을 인정하고 수용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시험 볼 때 문제를 푼다. 문제를 보고서 문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답을 푸는 것과 같다. 답을 푸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괴로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성제 중에 하나만 관통해도
지금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괴로워만 할 뿐이다. 한시바삐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벗어날 수 없다. 이럴 때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야 한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괴로움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있다.
“벗들이여, 저는 그것에 대해 이와 같이 벗들이여,
1)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2) 괴로움의 발생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3) 괴로움의 소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4)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보는 자는 괴로움도 보고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라고 세존께서 직접 듣고 직접 배웠습니다.”(S56.30)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도 본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성제 중에서 하나만 관통해도 나머지 진리는 따라온다는 것이다. 누군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철저하게 알았다면 그는 나머지 진리도 아는 것이나 다름없음을 말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를 푸는 것은 시간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과 같다.
괴로움을 알아야 괴로움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모르고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 수 없다. 괴로움을 알아야 괴로움의 원인을 알 수 있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새로운 원인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팔정도이다. 팔정도는 결과로 나타나는 '괴로움의 소멸'의 원인이 된다.
사성제는 인과로 구성 되어 있다. 과가 먼저 나오고 인이 나중에 나온다. 고성제가 과이고 집성제는 인이다. 멸성제가 과이고 도성제가 인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과로 나타나는 멸성제는 궁극적 체험에 대한 것이다. 열반체험을 했다면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해야 한다. 그래서 팔정도는 수행도가 된다.
괴로움을 아는 것이 깨달음
사람들은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여섯 감각기관을 이용하여 늘 즐길거리를 찾는다. 즐길거리를 찾는 것은 무언가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렇게 즐길거리만 찾다보면 윤회가 멈추지 않는다. 계속 괴로움의 과보만 받게 된다.
태어난 것도 즐길거리를 찾은 결과에 따른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난 모든 존재는 괴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오온에 집착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남이 괴로움이고 존재자체가 괴로움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오온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알았을 때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깨달음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할 수 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재생은 없어졌네.”(D16.34)
2020-07-18
담마다사 이병욱
'금요니까야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요모임 가는 날에 (0) | 2020.07.25 |
---|---|
금요니까야강독모임 안내 (1) | 2020.07.20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0) | 2020.07.17 |
지혜와 자애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은 것 (0) | 2020.07.15 |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0) | 2020.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