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피는 스님
향과 관련하여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향을 하나 사르었다. 한두시간 후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같은 복도 사무실 사람 두 명이 들이 닥친 것이다. 그들은 다짜고짜로 “여기서 담배 피웠습니까?”라며 물어보았다. 순간 향냄새 때문인 것으로 알았다. 그렇다고 향을 피웠다고 말하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담배 피우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물러 갔다.
요즘은 건물 전체가 금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물에서 담배를 피우면 과태료 대상이 된다. 자신의 사무실이라고 해서 담배를 피워서도 안된다. 향을 피웠음에도 담배 피운 것으로 오해하여 들이닥쳤을 때 담배냄새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거의 십년 된 것 같다. 이전에는 습관적으로 몇 개피 피웠다. 하루 한갑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갑 정도 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금연운동과 함께 그만 두었다.
담배는 어떨 때 피울까? 습관적으로 피우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스트레스 받았을때 담배를 피우게 된다. 특히 회의할 때 담배를 피우게 된다. 무언가 풀리지 않을 때도 담배를 입에 문다. 글 쓰는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장면이 이를 말한다.
담배는 해롭기만 할까? 담배의 장점도 있다. 스트레스 받았을 때 담배를 빨면 머리 끝까지 올라간 화를 가라 앉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몸을 태우는 행위에 해당된다. 직장인들은 자신의 몸을 태워 가면서 살기도 하는 것이다.
담배를 피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다. 무언가 꽉 막혀 있을 때 담배 피다 보면 해결책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작가들뿐만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프로그램이 꽉 막혔을 때 잠시 휴식 기간을 갖는다. 대개 담배 피다가 문득 해결책을 찾는다. 하드웨어 엔지니어도 문제를 해결되지 않을 때 납땜 도구를 놓는다. 밖에 나가 찬바람 쐬며 담배를 필 때 무심코 해결책이 떠 오른다. 이렇게 담배의 순기능도 있다. 그렇다면 출가승이 담배 피우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담배피는 스님
최근 에스엔에스에서 출가승의 담배 피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담배를 거의 입에 물고 다니다시피 하는 노스님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율장에 금연 이야기가 없습니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K스님이 댓글에 댓글을 달았다. K스님은 “팔정도에 올바른 생명활동이 있습니다. 올바른 감각적 욕구의 제어가 필요합니다. 담배를 피워도 그만 안피워도 그만이면 피울수도 있고 안필수도 있겠죠. 그러지 못하고 못 피워서 안달이 날 정도면 지식은 많고 논리는 수승한지 몰라도 속빈 강정일 뿐입니다. 먹고 안먹고가 개차법(開遮法)의 범주에 있으니 틀렸다 맞다를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상황논리가 있습니다. 이럴때는 이랬고 저럴때는 저랬습니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율장의 구절에 이랬다 저랬다 근거로만 결론을 도출해 버립니다.”라고 답댓글을 써 놓았다.
K스님은 노스님의 담배 피우는 행위와 재가자의 상황논리를 무시한 행위를 비판했다. 이른바 양비론이다. 이런 비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피웠을 때
담배피는 것은 습관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너무 오래 되어서 끊을 수 없다면 중독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독에 있어서는 알코올중독과 같은 것이다.
오계에서 불음주계가 있다. 이는“곡주나 과일주 등의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지키겠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취기가 있는 것에 취하는 것’은 빠마닷타나(pamādaṭṭhāna)를 번역한 말이다. ‘방일의 토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게으름의 토대가 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해당될 것이다. 그것도 습관화 된 것을 말한다. 이를 중독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알코올중독이나 담배중독이나 중독에서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이는 방일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라고 했다. 이는“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D16.125)라는 뜻이다. 여기서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appamāda)는 사띠(sati)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는 또다른 말로 “새김을 잃어버리지 말고 모든 해야 할 일을 성취하라.”(Smv.593)라는 뜻이 된다.
부처님은 술과 같은 취기가 있는 것을 마셔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동아시사아 불교에서는 무시되기 일쑤이다. 곡차라는 이름으로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마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방일한 것이 되고 사띠를 하지 않은 것이 된다. 더구나 습관화 되었다면 사실상 계가 파한 상태가 된다.
계를 파하면 즉각 복원해야
계를 파하면 즉각 복원해야 한다. 재가불자가 피치 못하게 술을 마셨을 때는 즉각 복원시켜 놓아야 한다. 법회에 참석하여 다시 오계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법회 할 때 마다 오계를 받아 지닌다. 심지어 니까야강독모임에서조차도 오계를 낭송하는데 이는 오계를 다시 받아 지니는 것과 같다.
법회할 때마다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은 오계가 ‘학습계율(sikkhāpada: 學處)’이기 때문이다. 어기면 참회하고 또 다시 받아지니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에 걸쳐 완성되기 때문에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본래 계율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재가자나 출가자나 계율은 지키기 어렵다. 그래서 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긴 채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계가 파한 상태가 되어서 더 이상 불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출가자라면 반승반속이 될 것이다.
계를 어겼으면 다음 법회에 참석하여 계를 받아 지녀 복구 시켜 놓아야 한다. 이는 출가승도 마찬가지이다. 매달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법회 때 받아 지니는 것이다. 실제로 미얀마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매달 보름마다 포살홀에서 쭈그리고 앉아 계목을 낭송하며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이번에 미얀마 스님의 범계가 교계신문에 보도 되었다. 테라와다 불교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무엇보다 모여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최소 네 명이 모여 살면 승가가 구성된다. 승가가 구성되면 보름마다 포살의식을 행한다. 이렇게 포살의식을 하면 계행에 어긋나는 승려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자자와 포살이 있는 승가에서 성자가 출현한다고 했다. 포살법회를 하면 계가 복원될 것이다.
담배를 피우면 악작죄
담배피는 스님이 있다. 오늘날 부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아마 분명히 “담배를 피우지 말라. 담배를 피우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하여 새로운 규정을 만들었을 것이다. 왜 그럴까?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K스님이 지적한대로 감각적 욕망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또 팔정도에서 말하는 올바른 생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이는 ‘잘못된 생활(micchāājīva)’ 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에 충실한 삶은 잘못된 생활이다. 출가승이 먹고 싶다고 먹고, 마시시고 싶다고 마신다면 이는 일반사람들의 행태와 다름 없을 것이다. 특히 술이 그렇다. 술을 곡차라고 하여 마신다면 오계를 어기는 원인이 된다.
술을 마시면 집중할 수 없다. 테라와다에서 술 마시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명상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담배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금연시대이다. 어디를 가나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심지어 향을 피웠는데 이를 담배 핀 것으로 오해하여 쫓아오기도 한다. 하물며 모든 것에서 모범을 보여야할 출가승이 담배를 핀다면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율장이 방대해진 이유
출가승이 술도 마실 수 있고 담배도 피울 수 있다. 그러나 상습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사람이나 재가자, 또는 동료 출가승의 비난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상습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가 있다. 누군가 그를 비난을 했을 때 그는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밧달리의 경’에서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밧달리여, 세상에 어떤 수행승은 계율을 상습적으로 어기는 자이다. 수행승이 그에게 충고하면, 얼버무리고, 화제를 돌리고, 분노를 나타내고, 증오를 보이고, 불만을 토로하며,..”(M65.32)라고 했다.
상습적으로 술을 마시는 수행승에게 술마시지 말라고 했을 때 잘 듣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화를 내고 짜증 내며 불만을 토로할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계율을 어기는 자는 충고에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계율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늘날 전승된 율장을 보면 매우 방대하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최근 출간된 통합본 비나야삐따까를 보면 율장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 부기 이렇게 다섯 가지가 망라되어 있다. 그 방대한 양에 놀라게 되는데 이는 세세하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에는 이렇게 계율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죄악을 저지를 자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단이 커짐에 따라 그에 따라 죄악도 늘어 갔다. 그때 마다 계율을 만들었는데 이를 ‘수범수제’라고 한다.
율장은 수범수제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죄를 지으면 법이 만들어지는 식이다. 그렇다면 법이 많다고 하여 법을 잘 지킬까? 계율항목이 많으면 성자가 많이 출현할까? 맛지마니까야 밧달리의 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밧달리여, 그것은 이와 같다. 곧 뭇삶들이 퇴폐하고 올바른 법이 사라지면 더욱 많은 학습계율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은 수행승들이 궁극적인 앎을 성취한다. 스승은 세상에서 번뇌의 뿌리가 되는 어떤 것들이 교단에 나타날 때까지, 제자들을 위한 학습계율을 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스승은 세상에서 번뇌의 뿌리가 되는 어떤 것들이 교단에 나타나면, 번뇌의 뿌리가 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제자들을 위한 학습계율을 세운다.”(M65.39)
부처님은 계율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번뇌의 뿌리가 되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는 계율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악을 지었을 때 계율이 비로소 시설됨을 말한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번뇌의 수만큼 계율이 많아 질 것이다. 율장이 방대해진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개차법(開遮法)에 대하여
K스님은 개차법(開遮法)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상황에 따라 열고 닫을 수 있는 법을 말한다. 이는 ‘예외 없는 법은 없다’라는 말과 같다. 이는 구족계의 ‘지범개차(持犯開遮)’로 설명된다.
계율은 근본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계율을 지키고(持), 잘못을 참회하고(犯), 예외규정(開)과 금지규정(遮)을 잘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출가승이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고 상습적인 것이 아니라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율장에서는 수많은 예외조항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생을 저질렀어도 의도가 실리지 않은 살생은 살생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계시다면
부처님이 이 땅에 계시다면 담배를 피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에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 집중을 방해하고 방일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담배를 피지 말라. 담배를 피면 악작죄가 된다.”라고 하여 새로운 계율을 만들었을 것이다.
담배를 어쩔 수 없이 피워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담배를 피지 못하면 병이 나고 죽음에 이를지 모른다면 허용해야 할 것이다. 아마 부처님이 이 땅에 계셨다면 담배에 대한 예외조항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담배는 번뇌의 뿌리가 되기 쉽다.
부처님은 번뇌의 뿌리가 되는 것을 제거하기 위해 학습계율을 세웠다. 그런데 계율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기고 참회하고 또 받아 지님으로서 평생에 걸쳐 완성된다. 그래서 학습계율이라고 한다.
술마시는 것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듯이 담배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록 담배가 율장에 나오지 않지만 담배는 피지 않는 것이 좋다. 세상 사람들이 싫어 하는 것이 담배연기이다. 이번 기회에 노스님도 담배를 끊었으면 좋겠다.
2020-08-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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