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도 중생이다
식물은 베어도 그 자리에서 싹이 난다. 행운목이 그렇다. 사오개월전 베어낸 행운목에서 싹이 나서 이제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보는 것 같다. 베어낸 가지도 잘 자라고 있어서 분가된 것처럼 보인다. 식물은 베어도 죽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의 구별 방법
생명이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 식물도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을까? 숫따니빠따 ‘멧따경’(Sn.1.8)을 보면 “살아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 남김없이”(Stn.146)라고 했다. 부처님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생명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과 식물의 구별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빠알리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동물과 식물관련구절을 보면 “tasā vā thāvarā”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라는 의미이다. 움직이는 것은 동물로 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식물로 본 것이다. 이는 ‘tasā’가 ‘movable; trembling’의 뜻이고, ‘thāvarā’가 ‘immovable; long-lasting’의 뜻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반면 동물은 움직이는 것이고 떨림이 있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의 구별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갈애(taṇhā)’이다. 붓다고사는 갈애의 여부로 구분했다. 그래서 “갈애가 있는 것이든 갈애가 없는 것이든”(Prj.I.245)이라고 주석해 놓았다. 이는 ‘정신작용이 있는지 없는지’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움직이는 것으로서 정신작용이 있는 유정체라면 동물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서 정신작용이 없는 무정체라면 식물로 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에는 식물이 생명체임을 말하는 구절이 여럿 있다. 숫따니빠따 ‘담마까경’(Sn.2.14)을 보면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Stn.394)라고 했다. 식물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함부로 꺽거나 베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 ‘사리뿟따경’(Sn.4.16)에서“식물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에게 자애를 베풀어야 하리라. (mettāya phasse tasathāvarāni)”(Stn.967)라는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생명에 대한 자비심이 식물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무한청정계율에 따라
수행자는 풀 한포기도 헤쳐서는 안된다. 식물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함부로 꺽는다면 이는 폭력이 된다. 그래서 출가수행승은 탁발에 의존한다. 배가 고파서 과일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따먹어서는 안된다.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과일을 주어 먹어서도 안된다. 주지 않는 것을 먹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빠라맛타만주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는 기근이 들었을 때 여행을 했다. 음식을 먹지 못해 피곤하고 허약해졌다. 그는 열매로 뒤덮인 망고나무 아래에 누웠다. 여기저기 많은 망고가 떨어졌다. 주인 없는 망고가 근처의 바닥에 떨어졌으나, 그것들을 집어서 줄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한 재가신도가 그가 지친 것을 알고 그에게 망고즙을 마시도록 주었다. 그는 그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갔다. 그때 그 장로는 그에게 설법을 했다. 그리고 그의 등위에 있을 때 앎과 봄을 통해서 길을 따라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빠라맛타만주싸, 306번 각주)
이 이야기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청정도론 306번 각주에 실려 있는 것을 옮긴 것이다. 장로는 기근이 들었을 때 탁발을 해도 먹지를 못했을 것이다. 기진맥진한 장로는 망고나무 아래에 누었는데 여기저기 망고가 떨어져 있음에도 먹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는 율장비구계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율장비구계를 보면 네 가지 승단추방죄가 있다. 이를 바라이죄라고 한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주지 않는 것을 빼앗음에 대한 학습계율’이 있다. 주지 않는 것을 가져 가는 것은 승단추방죄에 해당됨을 말한다. 그것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떨어져 있는 과일일지라도 적용된다. 그래서 율장비구계를 보면 “훔칠 마음으로 만지면, 악작죄를 범하는 것이다. 흔들면, 추악죄를 범하는 것이다. 장소에서 옮기면, 승단추방죄를 범하는 것이다.”(Vin.III.50)라고 했다.
훔칠 마음으로 만지기만 해도 악작죄가 된다. 따려고 흔들면 추악죄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따서 옮기면 승단추방죄가 된다는 것이다. 장로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허기져서 죽을지경이 되었음에도 떨어진 망고를 먹지 않은 것이다. 손을 대는 순간 악작죄가 되고 집는 순간 추악죄가 되고 이동하는 순간 승단추방죄가 되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재가신자가 장로를 발견했다. 그리고 망고즙을 마시게 해 주었다. 오후에는 불식이기 때문에 즙을 내서 마시게 해 준 것이다. 재가자는 지친 장로를 등에 업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 갔다. 이에 장로는 설법을 해 주었다. 재가자는 재보시하고 출가자는 법보시 하는 것이다. 장로는 “건강한 사지를 위해 재물을 버려야 하고, 목숨을 수호한다면 사지를 버려야 한다. 사지와 재물과 목숨 그 일체를 가르침을 새기는 사람은 응당 버려야 한다.”(Vism.1.133)라고 말했다.
수행자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계행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주지 않는 것을 가져 가지 않는 것은 목숨보다 소중한 계율이다. 장로가 이렇게 극단적일 정도로 계행을 지키려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하신 계행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부처님이 아직 설하지 않은 ‘무한청정계율’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무한청정계율은 부처님이 아직 설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계율은 수범수제로 되어 있는데 죄를 범하면 제도가 만들어지는 식을 말한다. 이렇게 하다보니 율장이 방대해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시설되지 않은 계율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수의 수만큼 계율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무한청정계율이라고 한다.
장로는 계율을 지키기 위해 망고나무 열매가 떨어져 있어도 주어 먹지 않았다. 장로는 현재 드러난 계율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시설될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도 먹지 않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승려가 담배피우는 것은 무한청정계율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지금 계셨다면 틀림없이 “담배를 피워서는 안된다. 담배를 피우면 악작죄가 된다.”라며 새로운 계율을 만들었을 것이다.
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사생자부’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이라고 한다. 또 ‘일체중생지류’라 하여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체를 말한다.
금강경에 ‘약무상(若無想)’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상유정천의 존재 (asañña sattā)’를 말한다. 색계 4선천의 존재로서 몸은 있으나 인식기능이 없는 존재이다. 인식을 혐오하는 수행을 해서 인식이 없는 중생으로 태어난 존재를 말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처럼 보인다. 살아 있지만 인식기능이 없기 때문에 죽은 것처럼 보이는 존재를 말한다. 마치 식물인간과 같은 존재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식물도 중생의 범주에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멧따경을 보면 “살아 있는 생명이건 어떤 것이나, 동물이나 식물이거나”모두에 대하여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 지이다.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Stn.147)라고 했다. 여기서 ‘모든 님들’은 ‘삽베 삿따(sabbe satta)’를 말하는데 ‘일체중생’을 뜻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움직이지 않고 정신기능이 없는 식물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부처님 보다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을 해쳐서는 안된다. 그러나 식물은 예외이다. 식물은 잘라도 새싹이 나기 때문이다. 식물은 잘라도 죽지 않기 때문에 살생업에 해당되지 않는다. 식물을 뿌리째 뽑아 버린다면 이는 식물을 해치는 것이 된다.
살생업에 대하여
사람들은 식물을 먹고 산다. 잘라도 다시 난다면 크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씨를 뿌려 먹기도 하고, 열매를 따서 먹기도 한다. 농사지어 먹고 사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기능이 있는 유정체를 해친다면 살생업이 된다.
정신기능이 있는 동물을 죽이면 살생업이 되지만 정신기능이 없는 식물을 죽인다고 해서 큰 과보가 되지 않는다. 살생업은 정신기능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기능이 높은 유정체를 죽이면 큰 과보가 된다. 아라한을 살해하면 무간업을 짓는 것이 좋은 예이다.
정신기능이 있고 몸체가 큰 생명체를 죽이면 과보도 크다. 개미를 죽이는 것과 코끼리를 죽이는 것에는 살생과보가 다름을 말한다. 범부를 죽이는 것과 성자를 죽이는 것도 과보가 다르다. 정신능력에 따라 받는 과보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에게 피가 나게 해도 무간업이 된다고 했다.
정신기능이 거의 없는 식물의 경우 죽여도 크게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풀한포기 베는 것과 커다란 낙락장송을 베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신기능과 몸체에 따라 받는 과보도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출가수행자는 식물도 해쳐서는 안된다. 그래서 떨어진 과일을 먹어서도 안된다. 이는 어쩌면 극단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무한청정계율과 관계가 있다. 모든 번뇌는 잠재적 계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자는 번뇌를 야기하는 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출가자가 농사를 지어서는 안되는 이유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재가의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식물을 헤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신기능이 거의 없는 식물은 크게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했다. 식물도 중생으로 본 것이다.
식물도 중생이다
행운목에서 새싹이 났다. 사온지 13년된 행운목이 자라서 천정을 쳤을 때 중간 가지를 자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자른 가지에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친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니 행운목은 생명 있는 것임에 틀림 없다. 더구나 행운목이 꽃을 피면 특유의 강렬한 향내를 발산하는데 더욱 더 생명이 있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오롯이 솟구친 행운목을 보면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비록 말도 못하는 무정물에 지나지 않지만 생명의 향기를 느낀다. 이는 다름 아닌 형성이다. 땅과 물과 불과 바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네 가지 세계로 이루어진 것에서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솟구친 가지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낀다. 식물도 중생이다.
2020-10-28
담마다사 이병욱
'반려식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옷 입은 여인초, 반려식물로서 새식구가 (0) | 2021.05.25 |
---|---|
아레카야자 분갈이를 하며 (0) | 2020.11.21 |
푸른 잎에서 생명의 경외(敬畏)를 (0) | 2020.10.09 |
화초 줄기 도둑 (0) | 2020.09.26 |
식물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0) | 2020.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