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사랑보다는 우정

담마다사 이병욱 2020. 12. 29. 11:41

사랑보다는 우정

 

 

가족을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가족의 관계는 사랑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동시에 증오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랑이 양면적임을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은 증오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으면 증오도

 

사랑이 있으면 증오도 있기 마련이다. 사랑만 있고 증오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그렇다. 부부사이의 사랑도 그렇고,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그렇다. 당연히 시부모와 며느리와의 갈등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의 품(Piyavagga)’라 하여 별도의 품이 마련되어 있다.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

사랑을 여읜 님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두려움이 또한 어찌 있으랴. (Dhp.212)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난다고 했다. 여기서 사랑은 빠알리어 삐야(piya) 를 번역한 말이다. 삐야는 형용사로서 ‘dear; amiable; beloved’의 뜻이 있다. 우정을 뜻하는 멧따(metta)와는 다른 것이다. 또 삐야는 여성명사로서 ‘(f.) the wife’의 뜻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삐야는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자에게 왜 슬픔이 생겨나고 두려움이 생겨날까? 사랑하는 자가 생기면 먼저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 그런데 슬픔도 생겨난다고 했다. 이는 사랑도 영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사랑도 무상한 것이다.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 그렇다.

 

애욕을 바탕으로 한 사랑에서 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즐거운 느낌에 대하여 갈애하면 집착이 된다. 사랑이 집착이 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알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넘어간다. 갈애는 집착으로, 집착은 업으로서 태어남이다. 그래서 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고성제에서도 볼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애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남녀간의 사랑은 애욕에 기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랑과 미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즐거운 느낌이 생겨나면 거머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내려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매순간 탐욕과 분노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애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잘 말해 준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불행이다.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는 자도 없는

그 님들에게는 참으로 속박이 없다.”(Dhp.211)

 

 

80년대 유행가 가사를 보는 것 같다. 아마 그 유행가는 법구경 게송을 모티브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애증관계를 만들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자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이는 자신에게 사랑스런 자나 사랑스런 것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애착하지 말하는 것이다.

 

애착했을 때 반드시 괴로움이 따른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마당에 하물며 사랑하는 것이 내 뜻대로 될 수 있을까? 사랑과 증오는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변덕이 죽 끓듯이 한다. 매순간 좋아했다 싫어했다 한다. 좋아하는 마음은 탐욕이고 싫어 하는 마음은 성냄이다. 이 두 마음은 항상 함께 한다. 이렇게 항상 호불호와 쾌불쾌가 함께 했을 때 변덕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기 보다는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사랑(piya)보다 우정(metta)임을 말한다. 부처님은 사랑보다는 우정의 가르침을 더 중시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감각적 욕망에 따른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우정에는 감각적 욕망이 들어가 있지 않다. 모든 존재에 대한 평등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정을 뜻하는 멧따는 자애, 연민, 기쁨, 평정을 뜻하는 사무량심으로도 설명된다.

 

사랑보다 우정

 

연인을 보면 기쁨과 함께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애욕이 바탕이 된 사랑이다. 그러나 친구를 보면 기쁨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법구경 사랑하는 자의 품을 보면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사람이 오랫동안 없다가

먼 곳에서 안전하게 돌아오면,

친족들과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가 돌아오는 것을 반긴다.”(Dhp.219)

 

 

사랑하는 자가 생기면 사랑과 슬픔이 생겨나지만, 친구는 기쁨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기쁨은 다른 것이다. 연인에게는 사랑이, 친구에게서는 기쁨이 키워드이다. 사랑보다도 우정이 더 수승한 것이다.

 

게송에서는 멧따의 대상이 세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친족(ñāti)과 친구들(mitta)과 동료들(suhajja)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씨족과 관계된 것은 친족이고, 상호교류로 성립된 것은 친구이고, 마음의 친절에서 생겨난 것이 동료이다.”(DhpA.III.293)라고 했다.

 

친족들은 언제 만나도 반갑다. 특히 사촌들이 반갑다. 오랜 만에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매일 함께 한다면 연인과의 관계에서처럼 애증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애증으로 변질되기 힘들 것이다. 무엇보다 씨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부모자식과의 관계처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요즘 시대에 친족(ñāti)은 어쩌다 한번 보는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매번 접한다. 우정을 기반으로 한다. 우정이 없다면 만나지 않을 것이다. 이성도 우정이 작동할까? 감각적 욕망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본다. 실제로 각종 모임에 다니다 보면 이성 친구들이 많은데 전혀 감각적 욕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좋은 예라고 본다.

 

친구(mitta)를 만나면 반갑다. 이를 달리 말하면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도움을 주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한결같고,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고, 연민할 줄 알기 때문이다.”(D31.16)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갑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는다면 친구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자애와 관련이 있다.

 

자애가 있으면 연민이 있고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다. 이것은 좋은 친구의 조건이다. 교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만일 교류가 없다면 친구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오로지 집에서만 살고 밖에 나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우정도 쌓을 수 없다.

 

가족끼리만 살게 되면 애증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부부끼리만 살고, 부모자식끼리만 살게 되면 친구가 있을 수 없다. 항상 함께 있으면 스위트홈이 될 것 같지만 그 반대일 수 있다. 그래서 눈만 뜨면 해만 뜨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사랑보다 우정이 더 좋은 것이다.

 

동료(suhajja)가 있다.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이다. 친구중의 친구를 요즘말로 절친(切親)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과연 나는 절친은 몇 명이나 될까? 절친에도 조건이 있다. 이는 경에서 명확하게 규정해 놓았다. “비밀을 털어놓고, 비밀을 지켜주고, 불행에 처했을 때에 버리지 않고, 목숨도 그를 위해 버립니다.”(D31.16)라고 했다. 이것이 절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이런 친구가 있을까? 인생에서 이런 친구 한명만 있다고 해도 성공이라 볼 수 있다.

 

왜 도반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는 사람은 많다. 스마트폰 주소록에는 천 개 가까운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업무상 만난 사람도 있고 재가불교활동하면서 만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두를 친구라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아는 사이, 즉 지인(知人)인 것이다.

 

지인이 격상되면 친구가 된다. 이는 우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정이 없다면 친구라고 볼 수 없다. 보면 반갑고 기쁜 사이어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친구가 되는데 있어서 나이나 성별은 단지 문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구나 연민할 줄 알면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는 친족과도 같다.

 

친구보다도 친족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는 절친이다. 비밀을 털어 놓고 비밀을 지켜 줄 수 있는 사이다. 부부사이가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 놓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친구 같은 아내, 친구 같은 남편은 있을지 몰라도 절친과 같은 아내, 절친과 같은 남편은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데 도의 길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도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도반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전부에 해당한다.”(S3.18)라고 말씀했다.

 

친구도 친구 나름이다. 친구(mitta)도 있고, 동료(sahāya)도 있고, 도반 (Sampavaka)도 있다. 친구에는 선우도 있고 악우도 있다. 그러나 동료는 선우만 있다. 그런데 도반은 도의 길을 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도반에 대하여 청정한 삶의 전부와도 같다고 했다. 왜 그럴까? 이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닦을 것이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힐 것이다.”(S3.18)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팔정도의 길을 함께 같이 가는 친구가 좋은 친구이다. 이런 친구를 친구라고 하기 보다는,  동료라고 하기 보다는 도반이라고 해야 한다. 또 요즘말로 절친이라고 해야 한다.

 

스스로 고립되어 사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서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도 공부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공부하다 보면 정진의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 모범이 되는 친구를 따라 하고자 할 것이다. 고귀한 팔정도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도반만한 친구가 없다. 사랑보다는 우정이다.

 

 

2020-12-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