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잠에서 깨었을 때 시계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스마트폰을 보니 새벽 세 시대이다. 더 이상 잠을 청하지 않는다. 금방 지나가기 때문이다. 세 시대부터 다섯 시대까지는 황금시간대이다. 모두 잠들었을 때 깨어 있다는 것은 유쾌와 상쾌를 넘어 통쾌한 일이다.
새벽 세 시대까지 안 자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밤과 낮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야행성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밤 늦게 야식하며 감각을 즐기며 밤을 지새다시피 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 시대는 이제 잠을 자야 할 시간대이기도 하다.
새벽시간에는 나홀로 있고자 한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고 에스엔에스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책도 보지 않는다. 자극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극받으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무의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것들이 튀어나와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멍때리기’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이 착 가라앉은 상태에서 떠 오르는 것이 있다. 부끄럽고 창피한 것들이 많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으나 지나고 보니 후회스러운 일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 상태라면 더욱 더 그렇다. 예를 든다면, 술 마시고 괴로워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탐욕으로 분노로 마셨을 때 특히 그렇다. 곰곰이 원인을 추적해 보면 갈애 때문이다.
모든 괴로움은 갈애로 인한 것이다. 이는 사성제에서 집성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집착은 갈애가 더욱 강화된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천은 갈애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갈애하게 될까?
갈애, 갈망, 갈구 이런 말은 다 같은 말이다. 빠알리어를 예로 든다면 딴하(taṇhā)를 번역한 말이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말한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딴하를 대체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까? 이럴 때는 경전을 열어 보는 것이 좋다. 부처님이 명확하게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ponobhavikā nandī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는 “재생을 가져오고 즐거움과 탐욕이 함께 하고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S56.11)라고 해석 된다.
집성제에서 갈애에 대한 설명을 보면 두 단어로 요약된다. 그것은 난디(nandī)와 라가(rāga)에 대한 것이다. 즐거움과 탐욕이다. 갈애는 즐거움과 탐욕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즐거움이 있는 곳에 탐욕이 있고, 탐욕이 있는 곳에 즐거움이 있어서 언제나 함께 한다. 그래서 “난디라가사하가띠”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사하가따’는 ‘함께한다’의 뜻이다.
유행가 중에 ‘노래 하는 곳에’가 있다. 윤항기가 부른 것이다. 가사를 보면 “노래하는 곳에 사랑이 있고, 노래하는 곳에 행복이 있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노래하는 곳에 즐거움이 있네.”라고 바꿀 수도 있다. 노래는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래를 즐기려는 탐욕이 개입되어 있다. 이를 한단어로 딴하, 갈애라 하는 것이다.
갈애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만 난다는 것이다.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다. 그 갈애의 끝은 어디일까? 아마 마약중독일 것이다. 그러나 마약은 큰 비용을 필요로 한다. 예산에 있어서 한계가 없는 재벌2세나 3세급이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돈이 없어서 즐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얼마든지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다. 서민들이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것은 한정된 예산으로 즐기는 것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즐기는 삶을 산다. 한정된 예산에서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예산에 한정이 없다면 더욱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즐긴다는데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부자의 즐거움이 있고 가난한 자의 즐거움이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길거리가 있다. 그래서 즐길거리를 찾아 다닌다.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몸이 있는 한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집성제에서는 이런 인간에 대하여 “따뜨라따뜨라비난디니 (tatratatrābhinandinī)”라고 했다. 여기서 ‘따뜨라따뜨라’는 ‘여기저기’라는 뜻이다. 즐길거리를 여기저기서 찾는다는 말이다.
우리 눈과 귀는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눈은 늘 두리번거리고 귀는 늘 쫑긋하는 것 같다. 그런데 쉽게 싫증 낸다는 것이다. 마치 매혹적인 형상을 접했지만 금방 싫증나서 다른 대상을 찾는 것과 같다. 그 결과 끊임없이 감각적 대상을 찾게 된다. 이에 대하여 “따뜨라따뜨라(여기저기서)”라고 했다. 이는 탐욕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따뜨라따뜨라 다음에 “비난디니”라고 한 것이다. 즐거움은 항상 탐욕과 페어로 움직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즐거움(nandi)을 추구하는 것이다.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귀한 자이건 천한 자이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다. 즐거움이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낙이 없으면 세상 살 맛이 없을 것이다. 한평생 술로 살아온 사람이 건강이상으로 인하여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되었을 떼 세상 살 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한평생 먹는 것을 즐겼는데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슬퍼질 것이다. 즐거움의 끝은 괴로움이다. 그래서 즐거움과 탐욕에 대하여 “뽀노바위까 (ponobhavikā)”라고 한다. 이는 재생을 부르는 즐거움을 말한다. 이것이 집성제이다.
집성제는 연기가 회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십이연기 순관구조와 같다. 십이연기에서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갈애가 생겨서 연기가 회전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 절망이다. 괴로움이 극에 달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절망으로 끝난다. 갈애가 존재를 만들어 절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욕이 함께 하는 즐거움은 재생으로서 존재를 만들게 하는데 이를 ‘뽀노바위까’라고 했다. 이 말은 다시를 뜻하는 뽀노(pono)와 존재하게 하는 것을 뜻하는 바위까(bhavikā)의 복합어이다.
탐욕이 개입된 즐거움을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재생으로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는 오취온(五取蘊)적 존재임을 말한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다.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에 집착된 존재를 오취온적 존재라고 한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것이다. 오온에 집착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오온에 대해 갈애하지 않았다면 또 다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상과 접촉했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알아차렸다면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느낌을 즐겼기 때문에 여기 이렇게 있게 되었다. 그런데 느낌은 갈애의 원인이 되고, 또 갈애는 집착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또 다시 재생하게 된다. 재생의 존재는 절망이라는 운명적 파탄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로서 나는 괴로움 덩어리이다. 태어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다. 그렇다면 죽으면 끝날까? 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재생된다. 또 다시 어떤 존재로 태어나서 괴로움이 시작된다. 그래서 죽음도 괴로움이라고 했다.
나는 괴로움 그 자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를 먼저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생, 노, 병, 사가 괴로운 것임을 알라고 했다. 이어서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를 설했다.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오취온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오온에 집착된 상태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게 된다. 그것이 집성제이다.
사성제는 연기적 구조로 되어 있다. 고성제와 집성제는 연기의 순관에 대한 것이고, 멸성제와 도성제는 연기의 역관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보다 괴로움의 결과를 먼저 설한 것과 같다. 마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과 같다. 인생에서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괴로움이다. 지금 괴롭기 때문에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부처님은 우리를 오취온적 존재라고 하여 우리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다. 살아가면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철견하면 괴로움은 다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고성제를 관통하면 나머지도 관통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괴로운 존재,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괴로움에 대해 철저히 알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지금도 괴로움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늙어가고 있고 병들어가고 있고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때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괴로움은 물론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사성제야말로 최고의 가르침이다. 지금 이렇게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이당 코 빠나 빅카웨, 두카사무다야 아리야삿짱:
야양 딴하 뽀노바위까 난디라가사하가따
따뜨라 따뜨라비난디니, 세이야티당:
까마딴하 바와딴하 위바와딴하.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
2021-01-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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