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자의 신비한 미소
작업하면서 동시에 유튜브를 듣는다. 마치 밭을 매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멀티태스킹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집중도가 떨어지는 단순 작업일 때 그렇다.
정치평론 유튜브를 보았다. 공영방송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이다. 유쾌, 상쾌, 통쾌한 정치이야기를 하는데 결코 유쾌하지 않다. 짜증만 유발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을 안주 삼는 것을 말한다.
시사프로 상당수는 인물 비평에 대한 것이다. 말이 비평이지 사실상 뒷담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로 부정적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불선업을 짖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도 불선업을 짖게 된다. 유튜브는 물론 종편채널에서도 볼 수 있다.
팔정도에 삼마와짜가 있다. 정어, 바른 언어를 말한다. 삼마와짜에서는 네 가지를 삼가한다. 무사와다(妄語), 삐수나야(兩舌), 파루사야(惡口), 삼팝빨라빠(綺語)를 말한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삼팝빨라빠는 잡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삼팝빨라빠가 ‘talking nonsense’ 또는 ‘useless talk’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사에 대한 이야기는 잡담이 되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된다.
시사이야기를 들으면 공허하다. 예능프로도 그렇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들을 때뿐이다. 남는 것이 없다. 그러나 대안을 제시하는 이야기를 한다면 달리 볼 수 있다. 시사프로 중에는 김종배가 진행하는 것이 그렇다. 항상 대안을 제시하기 때문에 공감한다. 한마디로 유익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김어준보다 훨씬 낫다. 품위 있고 절제된 표현은 매우 비교된다. 김어준 시대가 가고 김종배 시대가 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든다.
일요일 낮 KBS에서는 전국노래자랑을 방영한다. 코로나 시기이어서일까 옛날에 했던 것을 재방영한다. 자막을 보니 2014년 포항편이라고 쓰여 있다. 이런 프로는 집중해서 듣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소음처럼 들린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노래는 울음이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춤은 광기이다. 고귀한 님의 계율안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것은 장난이다.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노래도 계율의 파괴이고, 춤도 계율의 파괴이다.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
노래가 있는 곳에 춤이 있다. 노래와 춤이 있는 곳에는 웃음이 있다. 노래방, 단란주점, 룸살롱, 나이트클럽 등 유흥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이에 대하여 노래는 울음이고, 춤은 광기이고, 웃음은 장난이라고 했다. 이천오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전국노래자랑에서 아마추어들은 힘껏 부른다. 그러나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이 듣는 다면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감정을 넣어서 부른다면 울음소리처럼 들린다.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울부짓는 것으로 들린다.
춤은 어떨까? 본인들은 신나게 즐길지 모르지만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아무리 춤을 잘 추어도 미친짓거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춤을 광기라고 한 것이다.
사람들은 즐거운 일이 있으면 이빨을 보이며 웃는다. 흰 이빨을 보이며 웃었을 때 매우 기쁘고 즐거워 보인다. 그러나 수행자의 입장에서 본 다면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은 천박하다. 코메디언이나 개그맨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것을 장난으로 본 것이다.
수행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수행자는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간다. 세상 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아 갈 때 수행자는 무탐, 무진, 무치의 삶을 추구한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다 보니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기 힘들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홀로 살거나 수행자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간다.
수행자는 팔정도로 살아간다. 팔정도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또 팔정도는 십선행에 대한 것이다. 계학과 관련해서 보았을 때 시사잡담은 무익한 것이다. 그런데 노래도 춤도 계율의 파괴라고 했다. 만약 기쁜 일이 있을 때 노래하고 춤을 추고 이빨을 드러내고 웃어야 할까? 수행자는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자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이유가 있어 기뻐한다면, 단지 미소 짓는 것으로 충분하다.”(A3.103)라고 했다.
수행자라 하여 감정이 없지 않을 수 없다. 감정은 자제되지만 미소는 잃지 않는다. 그것은 자애의 미소가 될 것이다. 수행자라 하여 감정없는 로보트와 같지 않다. 수행자라 하여 이성만 있고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는 감정은 절제 되지만 자비는 한량 없다. 단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부처님과 아라한에게만 있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미소짓는 마음(hasituppāda cittaṃ)’이다. 이와 같은 미소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비담마에서는 미소짓는 마음에 대해 “기쁨이 함께하고 원인을 가지지 않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이빨을 드러내며 웃지 않는다. 깨달은 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신비한 미소인 것이다.
2021-01-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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