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머물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상반된 주장으로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강을 건너는데 적용하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상윳따니까야에 1번경이 있다. 56개 주제와 수천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방대한 경전에서 1번경은 의미가 있다. 마치 주제가처럼 보인다. 경전전체를 아우르는 게송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그렇다. 1번 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물결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던 것입니다.” (S1.1)
하늘사람(天神)이 묻고 부처님이 답한 것이다. 천신은 “당신은 어떻게 거센 물결을 건너셨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라고 말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이럴 때는 주석을 보아야 한다. 한역 아함경에는 주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전승된 니까야에는 주석뿐만 아니라 복주석까지 있어서 본래 말씀을 왜곡없이 지켜 왔다.
부처님은 피안, 저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에 대해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머물면 가라앉고 애쓰면 말려든다고 했다. 어느 경우이든지 휩쓸려 가 버린다. 윤회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바라밀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는 파라미타라 하고 빠알리어로는 빠라미(parami)라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건넘’이 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초월’로 번역했다. 어디로 건너감을 말하는가? 저언덕이다. 피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언덕과 저언덕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바다처럼 넓은 강이다. 더구나 소용돌이 치며 거세게 흐르는 강이다. 이를 폭류라고 한다. 또는 거센 흐름이라고 한다. 빠알리어 오가(ogha)를 번역한 말이다.
인도에서 우기가 되면 폭우로 갑자기 강물이 불어난다. 이런 경우 겐지스강이 생각난다. 인도순례 때 파트나에서 갠지스강을 건넜다. 부처님 당시에는 라자가하에서 베살리로 가기 위해서 이 강을 건넜다. 건기에는 강폭이 좁아 쉽게 건널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기에는 맹렬한 기세로 흘렀을 것이다. 그런 강을 오가, 즉 거센 흐름 또는 폭류라고 한 것이다.
흐름이 거세다고 하여 이 언덕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 부처님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라고 했다. 그러나 범부들에게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다. 학인 우빠씨바는 “싸끼야시여,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는 커다란 흐름을 건널 수 없습니다. 제가 의지해 이 거센 흐름을 건널 수 있도록 의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널리 보는 눈을 가진 님이여.”(Stn.1069)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저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차안과 피안 사이에 있는 폭류를 건너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머물러도 안되고 애써서도 안된다는 아리송한 말을 했다. 이는 오욕락으로 차안에 머물러서도 안되고 피안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과도한 집착을 해서도 안된다는 말이다. 어찌보면 중도의 가르침처럼 보인다. 실제로 주석을 보면 그런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언덕은 윤회하는 삶의 언덕이고 저언덕은 윤회가 끝난 열반의 언덕이다. 그런데 이언덕과 저언덕 사이에는 바다처럼 넓은 강이 있고 그것도 소용돌이 치는 거센 흐름이 있다. 대부분 폭류를 건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이언덕도 폭류와 같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름아닌 윤회하는 삶이다. 또다른 말로 연기하는 삶이다. 유전적 연기를 말한다.
저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연기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연기를 소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십이연기에서 환멸연기가 이에 해당된다. 사성제에서는 멸성제와 도성제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연기의 흐름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괴롭다. 사성제에서 고성제와 집성제가 이에 해당된다.
저언덕으로 건너 가려면 먼저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고성제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해 내것이라고 집착하는 한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집착은 새로운 존재로서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생, 노, 병, 사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괴로운 것이다. 여기에다가 삶의 과정에서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까지 있게 된다. 그래서 오취온적 존재로서 우리는 괴로움 덩어리이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마치 마약과 같은 오욕락에 마취되어 애써 잊으려 하고 있다. 이것이 멈추는 것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가서 괴로움을 멈추어야 하나 이 언덕에서 오욕락의 삶으로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윤회의 바다에 휩쓸려 버리고 마는 것이다.
윤회의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섬이다. 여기서 섬은 생사윤회가 끝나는 열반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생사윤회하는 폭류와 같은 곳이다. 머물면 휩쓸려 가 버린다. 안전한 섬으로 가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애쓸수록 역시 폭류에 떠내려 가버린다.
머물러도 떠내려 가버리고 애써도 떠내려 가버린다. 오욕락으로 즐기는 삶을 살아도 죽음이라는 운명적 파탄에 직면하고, 저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과도한 집착을 해도 역시 운명적 파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피안의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을까?
부처님은 문제만 제기하지 않았다. 동시에 해법도 제시했다. 대표적으로 사성제를 들 수 있다. 부처님이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라고 한 것도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 가르침에 충실해야 함을 말한다. 머문다는 것은 오욕락에 머무는 것을 말하고, 애쓴다는 것은 잘못된 교리에 대해 집착함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번뇌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조건적인 발생과 의도적인 형성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둘째, 갈애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견해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셋째, 영원주의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허무주의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넷째, 해태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혼침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다섯째, 감각적 쾌락에 대한 몰두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자기학대에 대한 몰두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여섯째, 모든 악하고 불건전한 의도적인 형성 때문에 머무르고 가라앉게 되고, 모든 세속적인 착하고 건전한 의도적 형성 때문에 애쓰고 휘말리게 된다.” (Srp.I.19-20)
이것이 주석의 힘이다. 이런 주석이 없으면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고”라는 말은 수수께끼 같고 아리송한 말이 된다. 그 결과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갖가지 견해가 생겨난다. 이렇게 여섯 가지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으면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다.
머무는 것에 대하여 번뇌, 갈애, 영원주의, 해태, 쾌락, 불선법에 따른 의도적 형성이라고 했다. 대부분 이렇게 산다. 탐, 진, 치로 사는 것이다. 저언덕으로 건너가려 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다. 그래서 가라앉는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괴로움이다. 세세생생 윤회하며 괴롭게 사는 것이다.
애쓰는 삶에 대하여 의도, 견해, 허무주의, 혼침, 자기학대, 선법에 따른 의도적 형성이라고 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삶을 살면 휘말리게 된다고 했다. 과도한 집착이다. 결국 윤회의 바다에 휘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세세생생 괴롭게 사는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1번경에서는 머물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고 했다. 머물면 가라앉아 버리고 애쓰면 휩쓸려 버린다고 했다. 머무는 것과 애쓰는 것은 양극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쾌락에 머물고 고행에 애쓰기 때문이다. 이럴 때 부처님은 중도를 설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팔정도의 가르침이다. 동시에 십이연기의 가르침이다. 또한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이고, 사성제의 도성제는 팔정도이기 때문에 서로 맞물려 있다. 사성제는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십이연기와 맞물려 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한치의 오차도 없다.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저언덕에 건너갈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쉽게 건너갈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살아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오욕락으로 살 때 오욕락을 여의는 삶을 살면 저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 오욕락에 머물지 않는 삶이다. 세상사람들이 잘못된 교리에 집착하는 삶을 살 때 정견을 가지면 저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다. 사견에 휩쓸리지 않는 삶이다.
가르침을 접하면 뗏목을 타는 것과 같다. 나무와 풀 등 재료를 이용하여 뗏목을 엮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손과 발로 저어서 거센 흐름을 헤쳐 나가야 한다. 부처님의 뗏목이다. 요즘 같으면 차를 타는 것과 같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갈 때 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고속도로는 국도나 지방도로와 달리 목적지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게 해준다. 고속도로는 부처님이 닦아 놓은 팔정도의 길과 같다. 목적지는 열반이다. 운전자는 운전대만 잡고 있으면 된다.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2021-01-1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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