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물적토대로서의 심장
지금 몇시나 되었을까? 스마트폰을 본다. 새벽 4시이다. 5시라면 늦고 3시라면 빠르다. 사실 3시에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다. 깨어서 사유도 하고 방안을 어슬렁 거리며 경행도 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평온한 시간이다. 이런 시간만 계속된다면 좋겠다. 외부에 자극받지 않아서 좋다. 책을 본다든가 에스엔에스를 하면 평온이 깨진다. TV를 켜서 뉴스를 보거나 영화채널에 머물러 있다면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책도 보지 않는다. 이런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는 것이 좋다. 그저 떠오른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다. 시각의 문이나 청각의 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부대상과 접촉하는데 있어서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몸과 같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문도 있어서 대상과 접촉한다.
생각은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저절로 발생한다. 일어난 생각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또 일어난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도 하나의 감각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기존의 5가지 감각의 문에다가 정신을 뜻하는 마노(mano)의 문이 하나 더 추가된다. 그래서 6문이 된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안, 이, 비, 설, 신, 의 이렇게 6가지 감각의 문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마음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마음의 문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마노(精神)도 눈이나 코와 같은 감감기관이라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오래전부터 마노를 감각기관으로 인정해 왔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생겨 나는 것일까?
시각은 눈을 토대로 하고 청각은 귀를 토대로 한다. 신체와 관련된 감각능력은 각각 토대가 있다. 그러면 정신의 토대는 어떤 것일까? 불교에서는 심장이 정신의 토대가 된다고 했다. 왜 두뇌가 아니라 심장일까?
요즘 사람들은 마음은 뇌에 있다고 말한다. 뇌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마음은 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뇌에는 본능적인 것을 담당하는 뇌, 감성적인 것을 담당하는 뇌, 이성적인 것을 담당하는 뇌가 있어서 뇌에서 마음이 생겨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이성적인 것은 인간에게만 있다. 언어로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러나 고대 사람들은 마음은 심장에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심장은 마음의 토대가 된다고 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심장(heart)은 마음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왜 하필이면 심장인가?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중심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을 심장부라고 말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물론 두뇌라는 말도 사용하지만 예로부터 심장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왜 그런가? 피가 있기 때문이다.
심장에서 펌프질하면 피는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우리 몸안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혈관이 퍼져 있다. 미세한 세포에까지 혈관이 있어서 피가 공급된다. 두뇌에서 부터 손끝, 발끝에 이르기까지 혈관이 있어서 피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더구나 피는 다시 심장으로 모인다. 피가 쫙 퍼졌다가 다시 쫙 모이곤 한다.
심장박동수는 1분에 50-70회이다. 이런 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심장이 멎으면 공식적으로 사망이다. 뇌의 기능이 멈추어 뇌사한 것을 사망으로 보지 않는다. 심장이 멈추어야 생을 다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뇌보다 심장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심장을 마노(精神)의 토대로 보고 있다. 뇌를 마음의 토대로 보지 않는다. 옛날 사람들이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서 심장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심장이라는 것은 심장근육을 말한다. 색깔로는 적색으로 홍련화의 꽃잎의 외면의 색을 띤다. 모양으로는 외부의 꽃잎을 제거하고 거꾸로 놓은 홍련화의 봉오리모양을 취한다. 밖으로 매끄럽고 안으로는 고과(苦瓜)와 같다.
지혜로운 자의 심장은 조금 개화된 모습을 취하고, 지혜가 모자란 자의 심장은 봉우리 그대로의 모습을 취한다. 또한 그 안쪽에는 뿐나가 나무의 핵자를 둘만큼의 간극이 있고, 거기에서 반 빠싸따 정의 피가 머무는데, 그것에 의지해서 정신의 세계와 정신의식세계가 활동한다.”(Vism.8.111)
청정도론에는 32가지 신체의 형태에 대한 명상주제가 있다. 심장에 대한 것을 보면 분명히 “그것에 의지해서 정신의 세계와 정신의식세계가 활동한다.”라고 했다. 마노가 심장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각이 눈에 토대를 두듯이, 정신은 심장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심장토대라는 말은 빠알리어 하다야왓투(hadayavatthu)를 번역한 말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이를 ‘마음의 물적토대’라고 번역했다. 마음에도 물질적 토대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마음은 물질을 통해서 발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심장을 마음의 물적토대로 본 것은 사실상 몸전체가 마음의 물적토대임을 알 수 있다.
청정도론을 보면 지혜 있는 자의 심장은 연꽃봉우리가 약간 벌어진 모양이라고 한다. 지혜없는 자는 봉우리진 모습이라고 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심장은 지혜와도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의 물적토대로서 심장은 정신능력과도 관련이 있다. 또한 과거 전생에 이룩해 놓은 성과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모두가 마노의 문을 통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심장을 마음의 물적토대로서 보았을 것이다.
마음의 물적토대는 심장이다. 그렇다면 뇌는 어떨까? 청정도론에서 뇌에 대한 것을 보면 ‘뇌수’로 설명되어 있다. 뇌수에 대하여 “두개골의 내부에 있는 골수의 더미”(Vism.8.126)라고 했다. 그 어디에도 뇌가 마음의 물적토대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뇌는 단지 32가지 신체기관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심장을 마음의 물적토대로 보는 것은 피와 관련이 있다. 피의 순환으로 설명된다. 피는 세포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당연히 뇌에도 전달된다. 이와 같은 피의 순환은 정보를 전달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일종의 두뇌역할을 하는 곳이 심장이다.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마음의 물적토대를뇌가 아닌 심장으로 삼은 것에 대하여 의문시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뇌과학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유물론적 주장이기 쉽다.
요즘 영화를 보면 뇌를 다운로드 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죽어도 기억을 다운로드 해 놓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발상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꿈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가능할까?
과학은 물질을 탐구한다. 원자를 쪼개고 또 쪼개는 것도 물질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과학이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한 물질을 벗어날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과학은 유물론이 될 수밖에 없다. 유물론자들은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몸이 파괴되어 죽으면 정신도 파괴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본다. 이는 다름 아닌 허무주의이다. 그리고 단멸론이다.
유물론자들은 정신은 육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마음은 두뇌의 전기화학적 작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억도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 발상에 이르게 되었다. 마음은 두뇌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은 두뇌에 있을까?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과학자들은 마음을 알 수 없다. 물질을 탐구하는 것과 마음을 탐구하는 것은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양자론으로 마음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한계가 있다. 양자도 물질에 대한 것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마음의 영역을 넘볼 수 없다. 물질을 탐구하면 할수록 새로운 것이 발견되어 이전의 이론이 폐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영역은 이미 완성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5백년 전에 부처님은 마음을 탐구하여 마음의 지도를 완성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마음의 영역을 탐구할 것이 없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 sammāsambodhi)”라고 했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말한다. 마음의 물적토대로서의 심장은 부처님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마음의 물적토대로서의 심장에 대해 사유해 보았다. 사유기능이 있는 대뇌신피질도 피가 공급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하다야왓투(심장토대)는 눈, 귀 등과 함께 빠라맛타담마(paramattha dhamma: 究竟法)가 된다. 82가지 구경법 중의 하나에 심장토대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구경법에 뇌는 보이지 않는다. 뇌는 단지 물질덩어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이 되면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이 흘러간다. 이것은 나의 의지와 관련 없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말라고 해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의지와 무관한 생각은 지켜볼 뿐이다. 생각에 끄달려 생각이 꼬리를 물면 망상이 된다. 단지 알아차리면 된다.
새벽시간은 눈의 문과 귀의 문 등 5가지 감각의 문을 차단시켜 놓은 상태이다. 강한 대상을 막아 놓았으니 남는 것은 마노의 문밖에 없다. 이런 조건이라면, 새벽시간은 마치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우뻬카사띠빠리숫디(upekhā-sati-pārisuddhi)”라는 말이 떠오른다. 팔정도경 삼마사마디에서 4선정에 대한 것이다. 평온과 사띠와 청정이 함께 하는 것이다. 한자어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고 한다. 4선정에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우뻬카사띠빠리숫디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새벽을 사랑한다.
새벽시간은 누군가에는 독서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사색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욕정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새벽시간은 고요해서 좋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이렇게 똑똑 칠 수 있어서 좋다. 치다 보니 원래 쓰려고 했던 것에서 빗나갔다. 펜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엄지 치는 대로 쓰는 것이다.
2021-01-15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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