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유가 왜 지혜의 영역에 해당될까?
삐알리 팔정도경을 외운지 한달이 되었다.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한두차례 암송하고 있다. 속으로 외우는 것보다 소리내어 외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주로 사무실 명상공간에서 경행하면서 나직이 암송한다.
운율은 없다. 그저 외기 바쁘다. 애써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외운다. 암송할 때는 천천히 한다. 빠알리 단어의 의미를 우리말과 영어를 떠 올리며 암송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운율따위를 고려할 경황이 없다. 때가 되면 운율을 넣어서 멋지게 큰소리로 암송하고 싶다.
팔정도경을 암송하다가 오늘 새벽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삼마상깝뽀(正思惟)가 왜 지혜의 다발에 해당되는 것인지 숙고해 본 것이다.
팔정도에서 혜학에 해당되는 것은 정견과 정사유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지혜라 하면 불교적 지혜를 말한다.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지혜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
부처님이 삼마딧티라 하여 ‘바른’ 또는 ‘올바른’ 의 뜻을 지닌 삼마(samma)라는 말을 사용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빗나간’ 의 뜻을 지닌 밋차(micchā)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부처님 당시 외도 스승들의 견해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들 수 있다. 이 두 견해는 양극단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거짓이다. 이를 빗나간 견해라 하여 밋차딧티라고 한다.
삼마딧티는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이는 팔정도경(S45.8)에서 “둑케 냐낭, 둑카 사무다예 냐낭, 둑카 니로데 냐낭, 둑카 니로다가미니아 빠띠빠다야 냐낭”으로 표현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수행의 방향을 잡아 주는 것과 같다. 이길로 주욱 가라는 것이다. 엉뚱한 길로 가서 헤매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팔정도경에서 가장 첫번째 항목으로 사성제라는 ‘바른 견해’를 제시했다.
삼마딧티는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그런데 팔정도경에서 지혜의 다발에 해당되는 가르침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삼마상깝뽀이다. ‘바른 생각’ 또는 ‘정사유’라고 한다. 정사유가 왜 지혜의 영역에 해당될까?
정사유에는 세 가지가 있다. 넥깜마상깝뽀, 아브야빠다상깝뽀, 아위힝사상깝뽀를 말한다. 각각 욕망을 여읜 사유, 분노를 여윈 사유, 폭력을 여읜 사유로 번역된다. 이 세 가지가 왜 지혜의 영역에 해당될까? 최근 페이스북에서 허정스님의 법구경 해설 글을 읽다가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는 불선업을 짓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말 때문이다.
사람들은 “착하게 살자.”라고 말한다. 또 “남에게 폐 끼치 말자.”라고 말한다. 소극적 공리주의에 해당될 것이다. 착하게 폐 끼치 않고 살면 잘 사는 것일까? 죽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일까? 그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지혜 없는 삶은 그가 아무리 착하고 폐 끼치지 않고 산다고 해도 불선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인간은 본래 불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취온적 인간은 탐, 진, 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된다. 마치 ‘엔트로피법칙’을 보는 것과 같다. 그가 착하게 폐 끼치지 않고 산다고 하지만 탐, 진, 치로 살아간다면 불선업을 저지를 수밖에 없어서 불선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살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우리는 불선업을 짓고 있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사유 세 가지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되는 것은 생각하며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 같다. 본래 불선한 존재로서 우리는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을 끊임없이 사유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정사유와 관련된 것으로 ‘메기야경’(Ud.34, A9.3)을 들 수 있다.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발견된다.
메기야는 부처님 시자였다. 아난다 이전의 시자를 말한다. 어느 날 새내기 수행승 메기야는 아름다운 망고숲을 발견했다. 마음속으로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홀로 수행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했다. 메기야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메기야는 마치 아이가 떼쓰듯이 간청했다.
메기야는 숲에서 홀로 수행했다. 대중을 떠나 홀로 있으면 수행이 더 잘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수행자에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경에서는 “나는 믿음으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였는데, 이와 같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 예를 들어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에 사로잡혀 있다니, 오! 놀라운 일이다. 오!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Ud.34, A9.3)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틀림없는 정사유에 대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어도 불선법이 일어난다. 욕망과 분노에 지배받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탐, 진, 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행위로 이어질 때 불선업을 짓게 된다. 욕정에 불탈 때 가만 있지 못할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할 것이다. 살인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어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병을 치료하는 의사와도 같다. 준비 안된 수행자 메기야에게 처방을 내려 주었다. 먼저 다섯 가지 원리를 알려 주었다. 그것은 1)선한 벗을 사귀는 것, 2)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 3)소욕지족 등 열반에 도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4)정진하는 것, 5)생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원리는 대중생활과 교학을 배우는 것으로 성취된다. 이런 기반도 없이 경치 좋은 곳에서 나홀로 수행했을 때 잡생각만 일어날 것이다.
부처님이 다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개인수행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네 가지 원리로 설명된다. 부정관, 자애관, 호흡관, 무상관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행을 한다고 하여 무조건 앉아 있지 말라는 것과 같다. 기초를 다져야 함을 말한다. 수행에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앞서 언급된 다섯 가지, 즉 “1)선한 벗을 사귀는 것, 2)학습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 3)소욕지족 등 열반에 도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4)정진하는 것, 5)생멸에 대한 지혜를 갖추는 것”을 말한다. 이런 바탕 하에서 본격적인 개인수행에 들어가야 한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때 나홀로 수행한다면 틀림없이 “감각적 쾌락에 매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에 지배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앉아만 있는다고 해서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을 알고 앉아 있는 것과 모르고 앉아 있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 가르침을 새기지 않고 수행에 임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휩싸이기 쉽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경에서 삼마상깝뽀는 지혜의 영역에 속한다. 가르침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교학적 내지 교리적 지혜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을 뜻하는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에서 냐나(知)에 해당되는 것이다. 언어적 사유로 얻어지는 지혜를 말한다.
팔정도에 두 가지 지혜가 있다. 하나는 정견이고 또 하나는 정사유이다. 그런데 불교적 지혜는 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냐나(ñāṇa)와 닷사나(dassana)를 말한다.
냐나는 언어적 사유로 이해하여 얻어지는 지혜(知)를 말한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법문을 늘 새기며 사유한다면 불교적 지혜가 생겨난다. 또 하나는 체험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를 ‘본다(見)’고 하여 닷사나라고 말한다. 수행으로 성취되는 지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냐나(知)와 관련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지배 받은 메기야에게 선한 벗을 사귀는 것 등 다섯 가지 원리를 알려 주었다. 이어서 닷사나(見)와 관련하여 부정관 등 네 가지 개인수행방법을 알려 주었다.
팔정도경을 암송하면서 정사유에 대해 사유해 보았다. 정사유가 왜 지혜의 영역에 대해 숙고해 본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놀랍게도 메기야경(Ud.34, A9.3)에서 잘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성숙되지 못한 수행자가 범할 수밖에 없는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대하여 다섯가지 원리로 설명했는데 이는 계학과 교학에 대한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수행에 임해야 하는데 네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단계적이다.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 났을 때 네 가지 수행방법을 제시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는 부정관을, 분노에 대해서는 자애관을, 폭력에 대해서는 호흡관을, 그리고 전체를 아우르는 무상관 수행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부정관(asubha bhāvetabba), 자애관(mettā bhāvetabba), 호흡관(ānāpānassati bhāvetabba), 무상관(aniccasaññā bhāvetabba)을 불교의 사대수행이라고 한다.
요즘 매일 팔정도경을 암송하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한번은 암송한다. 1,100여자에 달하는 경을 한번 암송하면 10분 걸린다.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며 암송한다. 뜻도 모르면서 빠른 속도로 암송하는 다라니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뜻을 알면서 암송하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고 말한다. 암송하고 나면 “싸두, 싸두, 싸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선망부모는 물론 모든 존재에게 회향한다.
2021-01-2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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