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쁨을 먹고 사는 그날은 언제

담마다사 이병욱 2021. 2. 17. 16:26

기쁨을 먹고 사는 그날은 언제


오늘도 한끼를 때웠다. 삼시 세 끼이다. 매일 세 번 식사를 해야 한다. 아침은 가볍게, 점심과 저녁은 제대로 먹어야 한다. 일을 하려면 먹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허기진 상태에서는 일을 할 수 없다.

일이 없으면 하루 두 끼 또는 한끼 먹어도 될 것이다.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먹기만 한다면 비난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라는 말이 나왔나 보다.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사실 대부분 먹는 것을 즐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기질 때 식사를 하면 행복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하루 세 번 행복한 밥상을 마주하게 된다. 한달이면 90, 일년이면 천번 이상 될 것이다. 일생이면 얼마나 될까? 백세를 산다면 10만번이 된다. 그 밥과 반찬을 쌓으면 산이 될 것이다. 이렇게 밥을 먹어서 뭐 하자는 것일까?

밥 먹을 때는 정신없이 퍼 넣는다. 마치 쫓기는 것처럼 위에 담고 보는 것이다. 본능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언제 먹이를 구할 수 없는 동물이 있는 그 자리에서 양껏 배를 채우듯이, 사람도 있을 때 최대한 먹으려고 한다. 그 모습이 짐승처럼 보이는 것이다. 제아무리 우아하게 식사한다고 해도 동물적 식사를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은 먹는 것을 즐긴다. 누구나 세 끼를 먹는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세 끼 이상 먹을 수 없다. 물론 새참도 있고 간식도 있고 야식도 있지만 세 끼가 기준이다. 그런데 돈이 많은 자는 좀 억울할 것 같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 끼 이상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의 질을 높인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가진 부에 비례하여 하루 백 끼, 천 끼 먹어야 함에도 세 끼만 먹는다면 손해일 것 같다. 그래서인지 먹는 것을 즐기는 것 보다 더 큰 즐거움을 찾는 것 같다. 가난한 자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그들만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마약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난한 자들은 삼겹살에 소주만 있어도 행복해한다. 부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는다. 끼니 때 배를 채움에 있어서 질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제식을 한다. 배는 차면 다음 허기질 때까지 다섯 시간가량 기다려야 한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먹는 재미를 느끼는 시간은 짧다. 부자는 하루 24시간을 풀가동하고자 할 것이다. 그래서 24시간 즐거운 상태가 된다면 가난한 자와 차별화될 것이다. 여기서 돈의 위력이 발휘된다. 백 끼, 천 끼 먹을 것을 24시간 풀타임 즐기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약하는 것으로 본다.

마약은 죽음의 길이다. 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남들 하는 것을 보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재난이라고 한다. 부자일수록 재난에 빠지기 쉽다. 가난한 자는 세 끼 먹기도 벅차기 때문에 염려가 없다. 로또 당첨자의 말로로도 파악되는 것이다.

오늘도 점심 한끼 먹었다. 배가 고프니 의무적으로 먹는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다면 먹을 일 없을 것이다. 배 고프지도 않은데 먹인다면 고문이 될 것이다. 앞으로 저녁 6시가 되면 또 한끼 먹을 것이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간단하게 또 먹을 것이다. 이런 일은 살아 있는 한 계속된다. 죽어서야 멈출 것이다.

먹지 않고 살 수 없을까? 욕계에서는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그러나 색계에서는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음과 같은 경전의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산다.”(D1.38)


색계 극광천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 존재는 기쁨을 먹고 산다고 했다. 기쁨이 음식인 것이다. 어떻게 가능할까? 몸이 깃털처럼 가볍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아 다닌다. 당연히 내장기관이 없어서 소화기관도 없다. 생식기도 없어서 남녀 구별도 없다. 불교적 세계관에 있는 세상이다. 누구나 선정을 닦으면 갈 수 있는 세상이다.

먹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는 결코 색계세상으로 가지 않으려고 할것이다. 성접교섭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도 역시 색계로 가려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욕망의 세계, 욕계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다시 욕계에 태어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선정수행하여 선정체험을 맛본 사람은 다를 것이라 본다. 선정의 잔잔한 즐거움은 욕계의 거친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욕계에 머물지 말라고 했다. 욕계를 벗어나라고 했다. 욕계를 벗어나 색계로 가라고 했다. 이는 팔정도경(S45.8)에서 위윗쩨와 까메히 위윗짜 아꾸살레히 담메히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에서 떠난 뒤라는 뜻이다. 삼마사마디에서 초선정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읜다는 것은 욕계를 떠나라는 말과 같다.

욕계를 떠났을 때 어떤 상태가 될까? 이는 위웨까장 삐띠수캉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말은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뜻한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상태이다. 항상 희열과 행복이 있어서 기쁨을 먹고 사는 것이 된다.

부처님은 팔정도경에서 기쁨을 먹고 살라고 했다. 감각적 쾌락을 여읜 기쁨의 상태를 말한다. 오욕락으로 인한 거친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마저도 내려 놓아야 한다. 부처님은 열반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기쁨을 먹고 사는 그날은 언제일까?


2021-02-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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