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괴로움 오종세트에서 벗어나고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29. 07:03
괴로움 오종세트에서 벗어나고자

매일 새벽을 맞는다. 나에게 있어서 새벽은 사유하는 시간이다. 잠에서 깼을 때 마음은 깨끗한 상태이다. 흙탕물이 가라 앉은 것과 같다. 그래서 잘 보인다. 자신의 얼굴도 비추어 볼 수 있고 바닥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새벽에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어제 잘 살았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어제 과음 했다면 괴로운 새벽이 될 것이다. 어제 풀리지 않은 문제로 괴뇌했다면 일어나기 싫은 새벽이 될 것이다.

어제 조금 앉아 있었다. 호흡을 보았을 때 앉아 있을만 하다. 계속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근심도 걱정도 슬픔도 괴로움도 절망도 없는 세계에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명상의 세계는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로 부터 해방인 것 같다.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 이 말은 무려 다섯 단어의 복합어이다. 고성제에서도 볼 수 있고 십이연기에서도 볼 수 있는 일종의 정형구라고 볼 수 있다. 이 복합어는 1)슬픔(soka), 2)비탄(parideva), 3)고통(dukkha), 4)근심(domanassa), 5)절망(upāyāsā)이 합쳐진 말이다.

앉아 있으면 슬품도 없고 비탄도 없다. 앉아 있으면 고통도 없고 근심도 없다. 앉아 있으면 무엇보다 절망이 없다. 앉아 있으면 한마디로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거든 앉아 있어야 한다.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동요 가사처럼 "그대로 멈춰라."라가 된다. 신나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출 수 있을까? 관성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멈추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 될 수 있다. 안하던 짓을 하려니 괴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다. 살아 있으니 꼼지락 거리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어쩌면 생존본능일지 모른다. 멈추면 죽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멈추는데 익숙하지 않다.

동요가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라고 했다. 더구나 "눈도 감지 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움직이지 마."라고 했다. 마치 명상을 말하는 것 같다. 즐겁게 춤을 춘다는 것은 우리 삶을 말하는 것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즐거움을 찾는다. 그래서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즐길거리를 찾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끊임없이 찾아 다닌다. 끊임없이 눈을 두리번두리번 거리고, 끊임없이 귀를 쫑긋세운다. 이른바 감각적 즐거움이다.

대부분 감각적 즐거움을 찾는다. 즐긴다고 말할 때 이는 눈이나 귀, 코, 혀, 신체로 즐기는 즐거움을 말한다.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삶은 재난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감각적 즐거움이 왜 재난일까? 이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 괴로움의 오종세트가 바로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인 것이다.

즐겁게 춤을 추었다면 멈추어야 한다. 그런데 춤을 추다가 멈추면 관성에 의해서 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멈출 수밖에 없다.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멈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멈추는 삶이 쉽지 않다. 마치 백미터 달리기 한 사람이 멈추기가 쉽지 않는 것과 같다. 폭주하는 삶에서 정지하는 삶은 괴로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래서 5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듯이 5분이 고문하는 시간처럼 보일 것이다.

일단 앉아야 한다. 그리고 눈을 감아야 한다. 눈을 감고 가만 있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호흡이 보이는 것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그것과 아는 마음 외 달리 어떤 것이 없다.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인지 모른다. 기쁨과 행복과 평온만이 있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 앉아 있으면 저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있다. 두 개의 세상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만 살고자 하는 것 같다. 이 세상은 감각의 세계이다. 거친 세계이다. 거친 감각적 즐거움의 세계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거친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 세계는 감각을 초월한 세계이다. 호흡만 있는 미세한 세계이다. 감각의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잔잔한 기쁨과 행복과 평온이 있는 세계이다.

이 세상이 있으면 저 세상이 있기 마련이다. 감각의 세계가 있으면 감각을 초월한 세계도 있다. 감각을 초월한 세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세계가 된다. 감각의 세계는 저 세계가 되는 것이다. 어느 세계에서 살 것인가? 감각의 세계에서 살며 감각을 즐기며 살 것인가, 아니면 감각을 초월한 세계에서 살며 감각을 여의는 삶을 살것인가? 아무래도 후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아침 6시가 되었다. 사유와 글치기를 끝내야 한다. 다시 삶의 현장으로 달려 가야 한다. 감각의 세계를 사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하루 한번이라도, 하루 한시간이라도 눈을 감고 가만 앉아 있으면 감각의 세계, 욕망의 세계를 탈출할 수 있다. 그 세계는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없는 세계이다. 오늘도 가슴이 설레인다.

2021-04-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