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호흡이 피난처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27. 11:16

호흡이 피난처

 

 

오랜만에 오래 앉아 보았다. 어제는 한시간 이상 앉았다. 오늘 오전은 50분가량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집중이 잘 되었다. 그것은 호흡과 관련이 있다. 호흡을 따라 갔기 때문이다.

 

요즘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감이 뚝 끊겨서 달리 할 것이 없다. 글쓰기는 매일 하는 것이다. 유튜브를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에이아이가 비슷한 것을 계속 연결해 준다.

 

정치와 관련된 것은 일체 보지 않는다. 영화와 관련된 영상을 주로 본다. 그러나 잡식성이다. 보다 보면 이것 저것 가리지 않는다.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광고는 짜증을 유발한다. 오래 보면 정신이 점점 황폐화되는 것 같다. 이럴 때 피난 가야 한다. 사무실 한켠에 있는 명상공간으로 향한다.

 

앉기 전에 예비동작을 취해야 한다. 바로 앉다 보면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집중이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경행하는 것이다.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리는 과정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집중이다. 이와 같은 집중을 바탕으로 앉으면 들어 가기 쉬울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도 효과적이다. 여기서 음악은 이미우이 음악을 말한다. 즐겨 듣는 것은 라따나숫따와 자야망갈가타이다. 두 음악을 듣다 보면 기쁨이 일어난다. 기쁨은 환희와 동의어이다. 음악이라 해서 같은 음악이 아니다. 삼보에 대한 예경과 찬탄을 노래하고, 부처님의 여덟 가지 승리의 게송을 노래하는 음악은 일반음악과 다르다.

 

예비수행으로서 권장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수념, 자애관, 부정관, 사수념이다. 이를 사대예비수행이라고 한다. 앉기 전에 간단히 하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불수념이다. 부처님의 열 가지 덕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내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여 일체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한다.

 

모든 괴로움은 욕망으로 발생된다. 이런 때 부정관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시체가 썩어가는 열 가지를 명상할 수 없다. 신체의 32가지 장기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신체기관을 하나하나 떠 올릴 때 매력적인 것이 아니다. 눈이 예쁘다고 하여 집착해 보지만, 그 눈을 떼어 내어 소독처리된 비이커에 담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예비수행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아마도 죽음명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는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음 확실하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죽을 수도 있다. 아니 한시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다급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삶은 불확실 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자.”라고 다짐할지 모른다.

 

사무실 명상공간에 앉았다. 불을 껐다. 형광등 불을 끄는 것이 더 낫다. 약간 어두침침한 것이 더 나은 것이다. 천을 둘렀다. 망토 같은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앉았을 때 천을 두르면 안정되는 것 같다.

 

반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전에는 평좌를 했었다. 평좌를 하면 오른쪽 다리가 저린다. 정확하게 이십분가량이 지나면 저리기 시작한다. 통증을 관찰하는 것도 수행이지만 통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반가부좌가 나은 것 같다.

 

 

방석을 반으로 접었다. 엉덩이 부분을 높이 하기 위한 것이다. 방석 두께가 십센티가량 두꺼운 것이어서 포근하다. 한시간을 앉아 있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준비는 다 되었다. 이제 가면 되는 것이다.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코끝에 집중하지 않는다. 배의 일어남과 꺼짐이 기본이다. 이를 마하시방법이라고 한다.

 

집중이 쉽지 않다. 온갖 잡념이 치고 들어온다. 그럼에도 호흡을 보고자 노력한다. 이것도 집착이다. 집착인 줄 알고 내버려 둔다. 내버려 두면 호흡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이를 놓치지 않는다. 마치 동아줄 잡듯이 붙잡고자 한다.

 

한번 호흡을 잡고 있으면 생각이 치고 들어와도 놓치지 않는다. 이는 전면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다. 이를 경전에서 말하는 빠리무캉사띠(parimukhaṃ sati)라 해야 할 것이다. 면전 또는 전면호흡이라 말해지는 것이다.

 

전면에서 호흡을 느끼고 그 호흡을 잡고 있으면 동아줄을 잡은 것과 같다. 통증이 일어나도 망상이 치고 들어와도 호흡만 붙잡고 있으면 안심이다. 금방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호흡을 붙들고 있다 보면 순간적으로 훤해질 때가 있다. 이때가 가장 평화로울 때이다. 기쁨과 행복, 평온이 함께 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선정상태는 아닐 것이다. 단지 예비수행 상태에서 일시적 집중현상이라고 본다. 호흡을 잡고 있으면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호흡과 함께 있으면 세상만사 근심걱정이 없다. 이런 맛을 보기 위해서 앉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감각은 거친 것이다. 눈으로 형상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나, 귀로 소리를 듣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힘이 든다는 것이다. 힘든 즐거움, 거친 즐거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만 앉아서 호흡을 보았을 때 평온은 잔잔한 것이다. 이를 잔잔한 즐거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호흡을 잡고 있으면 힘이 들지 않는다. 힘이 들지 않으면서도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감각에 길들여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앉기가 쉽지 않다. 감각적 즐거움은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앉고자 한다면 먼저 감각적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한다. 감각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 앉아 있을 수 없다. 감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호흡에 집중할 수 없다. 호흡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앉으려거든 먼저 감각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한다. 경행을 하거나 불수념 등 네 가지 예비수행을 하여 먼저 마음을 돌려 놓아야 한다.

 

자꾸 앉아 보아야 한다. 앉아 버릇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의무적으로 앉기 해야 한다. 하루 30분 만이라도 앉아 있어 보는 것이다. 이는 강한 결심을 필요로 한다. 이른바 결정바라밀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앉으면 좋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욕망의 세계, 욕계가 아니다. 욕망이 떠난 세계로 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전혀 다른 세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호흡만 있는 세계를 말한다.

 

호흡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세상에 호흡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도중에 생각이 치고 들어오지만 호흡을 잡고 있으면 곧 사라지고 만다.

 

호흡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계속 밀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아직 그런 세계에 가보지 못했지만 주욱 그길로 가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라고 본다.

 

두 가지 세상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현실세계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세계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세계는 내면세계이다. 마음을 내부로 돌리면 내면의 세계도 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면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나만의 세계라 해야 할 것이다.

 

내면세계는 호흡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런데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사에서 피난 온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호흡은 피난처라고 볼 수 있다.

 

세상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하다. 그렇다고 근심하고 걱정한다고 하여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 있다.

 

세상만사 근심과 걱정을 해서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럴 경우 도망가야 한다. 어디로 도망가는가? 호흡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가만 앉아서 호흡을 보면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된다. 현실에서 떠난 것이다.

 

호흡을 즐기고자 한다. 호흡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호흡관찰 하는 것에 대하여 인위적 조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말한다. 손뼉을 치면서 이것을 보라고 말하고, 종을 치면서 이것을 보라고 말한다. 책상을 두드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것도 조작일 것이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조작인지 모른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했다. 앙굿따라니까야‘앗타까 시의 경(A11.16)’에 다음과 같은 놀라운 가르침이 있다.

 

 

“장자여, 여기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첫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 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A11.16)

 

 

부처님은 선정도 조작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네 가지 선정도 조작된 것이고, 사무량심도 조작된 것이고, 또한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천도 조작된 것이다.

 

부처님은 선정이 왜 의도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라고 했을까? 이는 무상한 것임을 말한다. 생겨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선정의 즐거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라면 조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감각에 의존하는 삶보다는 호흡에 의존하는 삶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일단 앉아야 한다. 그래야 떠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떠나려면 앉아서 호흡을 잡고 있어야 한다. 마치 동아줄 잡고 있듯이 호흡을 잡고 있으면 다른 세계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S15.1)라는 표현을 했나 보다. 부처님도 라훌라에게는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멀리 떠나라”(stn340) 라고 했다. 호흡이 피난처이다.

 

 

2021-04-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