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희망을 노래하지 말자

담마다사 이병욱 2021. 4. 25. 20:19
희망을 노래하지 말자

사람들은 희망을 말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말한다. 작은 구멍에서 희망을 보는 것이다. 희망의 싹이 자라면 또 다시 번영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희망은 절망의 늪에서 피는 한송이 꽃과 같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때 하나의 동아줄 같은 것이고, 암흑천지에서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정말 희망은 구원의 메신저일까?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

여기 괴로움의 끝장을 본 자가 있다. 그는 일체가 괴롭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다. 머리로 아는 자가 아니다. 절절하게 괴로움을 겪은 자이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괴로움 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즐거움은 발견되지 않는다.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본다고 했다. 겟투(get two)이다. 그런데 괴로움을 보는 자는 소멸도 보고 소멸로 이끄는 방법도 보는 자라고 했다. 1석3조가 되고 1석4조가 된다. 괴로움 하나만 제대로 보면 나머지 세 개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지금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괴로운 자가 있다. 그에게 바늘 구멍만한 희망이 있다면 어떨까? 그 한가닥 희망을 인연으로 재기할지 모른다.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지 모른다. 다시 옛날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어떤 희망도 없어야 한다. 어떤 희망도 발견하지 못했을 때 세상을 버릴 수 있다. 세상을 괴롭다고 알았을 때 더 이상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즐거운 구석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이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멈추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꼼짝말고 가만 앉아 있어야 한다. 앉아 있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호흡이다. 호흡은 일어나고 사라진다. 오로지 생멸뿐이다. 세상에 호흡만 있다. 세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은 못한다. 컴퓨터처럼 멀티태스킹이 안된다. 동시에 기쁨과 슬픔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마음은 한순간에는 하나의 일만 한다.

호흡을 관찰하면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조건 발생하여 조건없이 사라진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 없다. 무싱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이라 하고,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 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부정한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한다. 욕망의 세계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오온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집착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힘을 필요로 한다. 파워가 있어야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집중해야 한다. 고도로 집중 했을 때 엄청난 파워가 생긴다. 돋보기로 햇볕을 한 곳에 포커스를 맞추면 연기가 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멈추어야 한다.

여기 타이어가 있다. 타이어는 안과 밖이 있다. 안은 마음이고 밖은 우주라고 볼 수 있다. 내면의 힘을 기르면 뒤집을 수 있다. 타이어의 안과 밖을 뒤집듯이, 마음의 힘으로 우주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가 내 마음 속으로 들어 오고, 내 마음이 우주가 되는 것이다. 이를 타이어론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들은 것이다.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되길 바란다. 괴로운 자는 행복해지길 바란다. 누구나 바라는 행복이다. 그러나 세속에서 행복은 감각적인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감각적 행복에 집착하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이 세상은 즐거울 것이 하나도 없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발견하는 한 이 세상에서 떠날 수 없다.

이 세상을 떠나려면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어떻게 내야 하는가? 오온을 염오해야 한다. 구역질 나도록 싫어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눈꼽만큼도 미련이 없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떠날 수 없다.

여기 토한 음식이 있다. 누구도 토한 것을 먹을 수 없다. 토한 것만큼이나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그래서 "닙비다 위라가 위뭇띠"라고 했다. 염오, 이욕, 해탈을 말한다.

대자유인이 되려거든 세상을 염오해야 한다. 그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오온에 집착되었을 때 괴로움이 발생된다. 우리는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느낌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괴로움이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를 먼저 설했다.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를 먼저 설한 것이 아니라 괴로움의 결과인 고성제를 먼저 설한 것이다. 그렇게 설한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결과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원인은 바꿀 수 있다.

괴로움을 알아야 괴로움의 원인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괴로움을 아는 자는 괴로움의 소멸도 알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방법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1석4조이고, 겟포(get four)라고 말할 수 있다.

이세상은 괴롭다. 이 세상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오온에 집착하고 있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령 행복감을 맛보기는 하지만 일시적이다.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불만족이다. 오온을 내것이라고 여기고 있는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체가 괴로움이라고 알아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조금이라도 희망을 말한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싫어하는 마음을 내어 떠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오취온적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괴로움에 대해서 절절하게 아는 것이다.

괴로움에 대해 뼈저리게 알아야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 모든 괴로움이 오온에 집착된 존재, 즉 오취온적 존재라고 아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을 보는 자는 괴로움의 발생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도 본다.” (S56.30)라고 했을 것이다.

2021-04-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