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내가 미움에서 벗어나기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6. 07:51

내가 미움에서 벗어나기를!


아항 아베로 호미, 이 말은 내가 원한에서 벗어나기를!”라는 뜻이다. 이미우이 음악에 있는 자비송의 한구절이기도 하다. 이 말에 사무쳤다.

분노는 고통이다. 분노가 왜 고통인가? 미워하는 마음을 내면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애관의 경송(mettābhāvanāpā
ha)’을 보면 저는 원한을 여의고, 또한 고통을 여의고, 근심에서 벗어나길 원하오니, 제가 행복하게 자신을 수호하기를!”라고 발원하는 것이다.

며칠전의 일이다. 페이스북 메신저를 받았다.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이다. 교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그는 급하게 자료를 요청했다. 번역비교를 해 놓은 피디에프(pdf)를 메일로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평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기꺼이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 되면 사무실에 방문해 달라고 했다. 점심과 차대접을 하겠다고 메세지를 남겼다. 그리고 곧바로 파일을 보내 주었다.

3
년 동안 작업한 파일이다. 인터넷에 이미 공개되어 있지만 파일화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누구든지 원하면 보내 주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답신이 없는 것이었다. 이에 받았는지에 대한 메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지금은 명상중입니다.”라는 짤막한 메세지를 남겼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더이상 메세지를 남기지 않았다. 자료만 가져 가고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감사하다는 짤막한 멘트를 남기기는 했으나 형식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지금은 명상중입니다.” 라는 말이다. 이를 명상중이니 말걸지 말라로 받아들였다한마디로 털렸다.”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왜 그 사람에게 집착하고 있을까? 내가 무언가 보상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그는 식사대접하고 차대접하겠다는 말을 너무 부담스러워 한 것은 아닐까? 아무런 답신을 보내지 않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속된 말로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겨 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또 속된 말로 쌩까는것에 대해 불쾌했던 것이다. 냉정하게 입 닦아 버리는 태도에 분노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미워하는 마음은 분노의 마음이 되기 쉽다. 분노는 원한이 되기 쉽다. 원한의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는 다름아닌 고통이다. 그래서 자애의 경송에서는 그 분노의 마음을 여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미움의 마음, 분노의 마음, 원한의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Na hi verena verāni,
sammantīdha kudācana
;
Averena ca sammanti,
esadhammo sanantano.”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


좋아 하는 게송중의 하나이다. 법구경 제1품 야마까왁가(쌍의 품)에 실려 있다. 내용이 너무 좋아서 법구경 1품에 있는 게송을 모두 빠알리어로 외웠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리지 않는다고 했다.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다. 만일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없어진다면 누구나 미움의 마음을 낼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다. 이문구는 하나의 공식과도 같다. 걱정의 자리에 원한을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러면 원한을 해서 원한이 없다면 원한이 없어서 좋겠네.”가 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미움의 불길은 거세게 타오른다. 미움은 분노가 된다. 분노하면 할수록 분노의 불길은 거세게 타올라 원한이 된다. 원한의 감정에 지배받았을 때 상대방을 해치게 될지 모른다. 디가부가 그랬던 것처럼.

율장대품에 디가부 이야기가 있다. 디가부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 하는 왕을 복수하고자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처형직전에 사랑하는 디가부야, 너는 길게도 짧게도 보지 말라.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으로 쉬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디가부야, 원한은 원한을 여읨으로써 쉬어진다.”(Vin.I.345)라고 말했다.

디가부의 아버지는 복수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런가? 보복하면 보복의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보복이 또 보복을 낳는 다. 그래서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복수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

살다보면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몇 달전에도 그랬다. 지난번에도 교수타이틀을 단 자에 의해 모욕당했다. 그는 에스엔에스(SNS)에서 대놓고 무시했다. 교리논쟁에 대한 것이다.

 

인터넷에 잡문이나 쓰는 자는 막 대해도 되는 것일까? 무시는 멸시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모욕당했다고 해서 모욕으로 앙갚음하면 어떻게 될까? 싸움 그칠 날 없을 것이다. 무시하고 멸시한 자에 대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한다면 어떻게 될까? 보복의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인내의 실천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의 어떤 사람은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않고, 분노를 분노로 갚지 않고, 욕지거리를 욕지거리로 갚지 않는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인내의 실천이라고 한다.”(A4.164)


부처님은 인내하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보복의 악순환 고리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때리면 맞아야 한다.

아라한은 때리면 맞는다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 ‘그는 나를 욕하고, 나를 때렸다. 그는 나를 굴복시키고, 나의 것을 약탈했다라고 사람들이 이러한 적의를 품는다면 그들에게 원한은 사라지지 않는다.” (Dhp.3)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원한은 원한으로 풀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원한은 원한을 내려 놓을 때 풀려진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 (esadhammo sanantano)” (Dhp.5)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은 니까야(經藏) 도처에서 볼 수 있고 위나야(律藏)에도 실려 있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미워한다고 해서 미움이 해소되지 않는다. 미움을 내려 놓았을 때 미움의 마음이 없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도 내려 놓았을 때 해소된다.

원한의 마음은 내려 놓아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여읜다고 말한다. 선가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한다. 원한을 내려 놓으면 자신도 수호되고 상대방도 수호된다. 이것이 자애의 마음이다. 내가 미움에서 벗어나기를!


2021-05-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