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6. 08:50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일요일 아침이다. 눈을 뜨자 마자 집을 떠나야 한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김치국을 만들어 밥을 말아먹었다. 빠른 속도로 뚝딱 해치우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여섯 시 반이 조금 되지 않았다.

 

 

오늘 해야 할 일이 있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기 때문에 일요일임에도 아지트로 나간다.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평화롭다. 벌써 내리 14년째이다. 그것도 같은 장소이다. 마치 산속의 암자처럼 고요한 곳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도심속의 은둔처라고 볼 수 있다.

 

절구커피를 만들었다. 원두를 20-30 알가량 넣고 절구질했다. 종이필터를 이용하여 내리면 세상에 가장 맛 좋은 커피가 된다. 마치 한약을 먹는 것 같다.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무엇이든지 혼자서 한다. 사업도 혼자하고 있다. 오늘 이렇게 마음이 든든한 것은 주말에 작업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일 하면 돈이 되는 것이다. 호미들고 밭을 갈면 마음이 편하듯이, 마찬가지로 모니터를 밭으로 삼고 마우스를 호미삼아 클릭, 클릭하면 마음이 편안한다.

 

가능하면 오전에 많은 일을 해치우려고 한다. 주로 오전에 글을 쓰지만 해야 할 것이 많다. 팔정도경도 암송해야 하고, 읽다 만 책도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행선과 좌선을 해야 한다.

 

 

어제 K선생을 만나고 자극받았다. 이런 인생도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수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빠사나와 인연이 되어서 20년 동안 수행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K선생은 생멸의 단계를 지나 염오의 단계를 이야기했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중반 이후에 있음에 틀림 없다. 아니 그 이상일지 모른다. 어쩌면 성자의 단계일지 모른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요일 아침 이렇게 자판을 두들기면서 지난날을 돌아본다. 삶이 영광된 것은 아니다. 소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돌아보면 괴로웠던 것 같다. 옛날로 되돌아 가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부할 것이다. 윤회해서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면 끔찍한 일이다.

 

K선생은 윤회하기 싫어서 수행했다고 한다. 교리나 교학에 대해 모르지만 사야도가 말한 것만 믿고 탐, , 치를 멸하는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탐, , 치가 상당히 약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K선생은 한때 미친 사람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가정이 있음에도 겨울만 되면 미얀마에 가서 석달을 보냈을 때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는 똑같은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임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부처님 말씀과 다름없다. 경전에 있는 말씀을 하기 때문이다.

 

K선생은 요즘 니까야를 보고 있는데 수행에서 얻은 체험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니까야를 보면 삐띠(喜悅)’가 일어난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수행체험이 없어도 니까야를 접하면 약간 들뜬 마음이 된다. 마음에 쏙쏙 들기 때문이다. 마치 마음에 탁탁 꼽히는 것 같다.

 

 

느낌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이다.’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에게는 느낌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느낌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22.8)

 

 

이 구절을 읽고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느낌과 비교해 보았을 때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온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느낌 대신에 물질, 지각, 형성, 의식을 대입할 수 있다.

 

지금 내가 슬프고 괴로운 것은 오온을 내것이라고 꽉 움켜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갈애와 집착이라고 한다. 갈애와 집착을 내려 놓으면 슬픔도 괴로움도 절망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니까야는 수행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의식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의식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의식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의식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의식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

 

 

마치 금강경에서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문구를 보는 것 같다. 의식은 무상한 것임에도 이를 움켜 쥐고 있다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조건발생한 의식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이다. 있다면 기억 속에나 있을 것이다.

 

기억은 실체가 아니다. 생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을 붙들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과거의 의식에도, 미래의 의식에도, 현재의 의식에도 마음을 두지 말하고 했다. 이를 싫어하여 떠난다.”라고 말한다. 염오하고 이욕하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염오, 이욕, 해탈이다. 이는 니까야 도처에서 닙비디야 위라가야 니로다야(nibbidāya virāgaya nirodhaya)”라는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을 내야 한다. 무엇을 싫어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온을 싫어 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오온에 집착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싫어 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떼어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 nibbidāya virāgaya nirodhaya paipanno hoti)”(S22.9)라고 했다.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런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냈으니,

토해서 버려진 것을 내가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토한 것을 다시 삼킬 수 없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보기를 토한 음식으로 보아야 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을 염오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야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고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으로 확인해야 할 것이다.

 

나의 마음은 내마음이 아니다. 나는 매일 매순간 마음에 속고 있다. 한시간 좌선한다고 앉아 있어 보지만 호흡이 보이지 않을 때 그만 두려고 한다. 마음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도 역시 마음에 속고 있다. 그런 마음을 내마음이라고 알고 있다. 그대 마음이여, 더 이상 나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기를!

 

상윳따니까야에서 오온상윳따(S22)를 보면 수행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수행자가 본다면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자신이 수행과정에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수행으로 증득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감한다면 간접적 체험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물질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물질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S22.18)라는 구절을 접했을 때 감동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렇게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태어난 나는 반드시 생물학적 존재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 있게 되기 까지 무수한 과거 전생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과 조건은 다른 것이다. 현재의 나와 전생의 나는 불일불이(不一不異)의 관계이다.

 

조건발생하여 여기에 있게 되었다. 지금도 계속 조건발생하고 있다. 앞으로도 조건발생하여 어느 세계에선가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

 

 

부처님은 이 세상을 싫어 하여 떠나라고 했다. 그렇다고 사람 사는 세상을 떠나 산속에서 숨어 살듯이 살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시각으로 만들고 청각으로 만드는 등 여섯 가지 감역으로 만들어 놓은 세계를 염오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염오하고 이욕해야 윤회를 끝낼 수 있음을 말한다.

 

일요일 아침이다. 절구커피를 마시면서 또 이렇게 글을 써 본다. 십년 이상 매일 오전 이렇게 쓴 글이 수천개가 넘는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청정한 마음이 된다.

 

부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썼을 때 다 이해 되는듯 하다. 그러나 아직 체험해 보지 못했다. 체험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번 생에서 경험해 보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루 한시간이라도 앉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지금은 꼼짝 못하는 상황이다. 마음은 미얀마에 가서 몇 개월 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대로 말수는 없다. 주어진 여건 속에서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경전속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 앉는 연습을 해야 한다. 본래불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인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고자 한다.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삶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

 

나의 삶은 불확실하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최후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아무래도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55)라는 문구가 마음을 때린다.

 

 

2021-05-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