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왜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6. 15:36

왜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야 하는가?


늘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강연이나 법문을 들으면 준비한 노트에 메모해 둔다. 메모지가 없으면 스마트폰 메모앱을 활용한다. 키워드라도 쳐 두면 나중에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지난주 토요일 백련선원 개원법회가 있었다. 그때도 메모해 두었다. 적다 보니 10페이지가량 되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둔다. 사무실 책장에는 메모한 노트만 100권가량 된다. 1987년부터 메모한 것이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쓴다. 녹음하지는 않는다. 메모가 더 편하다. 녹음해 보았자 듣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녹취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중작업이 된다. 그래서 강연이나 법회내용을 잘 듣고 그 자리에서 기록해 둔다.

 

백련선원 개원법회 때 혜송스님이 이런 말을 했다. 나에 대하여 아난존자 같다고 했다. 참석자들을 한명한명 소개하면서 내차례가 되었을 때 한 말이다. 이는 과찬의 말이다.

아난다존자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모두 머리에 기억해 두었다. 자신이 부재중에 한 말은 꼭 자신에게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아난다 존자를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한다. 이는 배운자 가운데 제일(bahusutta
aggo)’이라는 말과 같다. 잘 듣는다는 것은 잘 배운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필기구가 없었다. 당연히 녹음기도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잘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는 고요했다고 한다.

잘 들었으면 잘 사유해야 할 것이다. 들은 것을 바탕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로서 끝나지 않는다. 사유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잘 듣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난다가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고도로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력도 비상했다고 볼 수 있다.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부처님에게서 팔만이천,

수행승들에게서 이천을 받아

팔만사천 법문을

나는 담지하고 있다.”(Thag.1030)


아난다는 팔만사천 법문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정법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온 것이다. 아난다는 가르침의 창고지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르침의 창고지기라는 말은 KPTS(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본 테라가타 인연담(1,123)에 나온다.

혜송스님이 나를 아난다에 비유한 것은 아마도 들은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기억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혜송스님은 법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이 공부는 지위와 관계없다고 했다. 그래서 도라는 것은 남녀의 구별이 없고, 잘난 자나 못난 자의 구별도 없고, 많이 배운 자나 배우지 않은 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얼마만큼 나를 버리고 집중하느냐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를 수행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세속의 지위와는 하등 관계가 없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만(mana)이다. 세 가지 자만이 있다. 태생적 자만, 배운 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이 대표적이다.

태생적 자만은 부처님 당시에는 바라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성직자 또는 출가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스님이라면 내가 스님인데.”라고 할 것이다. 배운 자의 자만은 학벌과 관련이 있다. 박사라면 내가 박사인데.”라고 할 것이고, 교수라면 내가 교수인데.”라고 할 것이다. 부자의 자만은 가난한 자를 경멸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가난한자는 게으르다고 보는 것이다.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게 산다고 보는 자만을 말한다.

세 가지 자만을 가진 자들은 그들 만의 리그를 만든다. 그들 만의 모임을 만들어 그들끼리 교류한다. 같은 지역에 모여 살기도 하고 자녀들도 같은 학교에 보낸다. 물론 그들끼리 혼맥을 이루기도 한다.

수행을 하여 도와 과를 이루는 것은 지위와 전혀 관련이 없다. 머리 깍고 절에서 산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박사라고 하여, 교수라고 하여 성자의 흐름에 쉽게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부자라고 하여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세 가지 자만은 도와 과를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요소로 작용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이 있기 때문이다. 자만을 가지고 있는 한 성자의 흐름 문턱에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는 지위와도 관계없고 귀천과도 관계없다고 했다.

부처님법이 좋아 부처님법을 공부하고 있다. 주로 글쓰기로 공부하고 있다. 경전과 주석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말한다. 쓰다 보니 수천개가 되었다.

부처님법 공부하는데 있어서 강연과 법문 만한 것이 없다. 남이 공부한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다. 힘 안들이고 내것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잘 노트해야 한다. 노트한 것을 가지고 후기를 작성했을 때 확실히 내것이 된다. 3년전 조준호 선생이 욕망에 대한 10회 강연을 했는데 강연으로는 이것이 대표적이다. 모두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가르침 내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듣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금요니까야강독모임에서 전재성 선생의 설명을 듣는 것은 기쁨이다. 두 시간 내내 받아 적기에 바쁘다. 물론 후기를 작성하고 블로그에 올린다. 2016년부터 시작했으니 5년 되었다. 그동안 올린 글은 100개가량된다.

나에게도 자만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세울 것이 없다. 재가자로 사니 태생적 자만이 있을 수 없다. 박사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니 배운자의 자만이 있을 수 없다. 부자가 아니니 부자의 자만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자만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열등의식도 자만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이 왜 자만일까?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디가니까야 합송의 경에서 세 가지 교만 곧, 내가 우월하다는 교만, 내가 동등하다는 교만, 내가 열등하다는 교만이 있습니다.”(D33)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이제까지 우월적 자만만 있는 줄 알았는데 열등감도 자만이라니!

우월적 자만도 있고 열등적 자만도 있다. 또한 동등적 자만도 있다. 어떤 자만이든지 해롭다. 왜 그런가? 자만은 불선법이기 때문이다.

불선법은 불선업을 짓는 원인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생적 자만, 배운 자의 자만, 부자의 자만으로 사는 자는 매번 불선업을 짓는 것이 된다. 그런데 열등적 자만을 가진 자들 역시 불선업을 짓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여 동등하다거나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Stn.799)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자만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반드시 우월적 자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열등적 자만도 해당된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거룩한 경지의 경(A6.76)’에 따르면, 여섯 가지를 끊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거룩한 경지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자만, 열등, 우월, 교만, 완고, 비열이다.”(A6.76)

 

 

여섯 가지 불선법을 보면 자만과 관련된 것들이다. 우월적 자만으로는 우월적 자만뿐만 아니라 열등적 자만도 해당됨을 알 수 있다. 특히 열등적 자만과 관련하여 비열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자만의 족쇄를 부수었을 때 거룩한 경지, 즉 아라한이 된다고 했다.

자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우월적 자만이든 열등적 자만이든 이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수 있을까? 자만을 가진 자가 자만을 가진 자를 평가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판사들의 판결은 올바른 것일까? 판사가 성자의 수준이라면 믿어도 될 것이다. 그러나 판사가 자만을 가졌을 때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자가 되지 말라.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람들에 대하여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아난다여, 나 또는 나와 같은 자만이 사람에 대하여 평가할 수 있다.”(A10.75)


부처님은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면 자신을 해치는 것이라고 했다. 한때 유행했던 말로 다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부처님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부처나 부처에 버금 가는 자가 판단하면 정확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면 사람을 해칠 수 있다. 이는 그 사람의 성품과 관련이 되어 있다. 그래서 아난다여, 그것에 대하여 평가하는 자가 이와 같이이 사람에게 그 성품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그 성품이 있다. 어째서 그들 가운데 하나는 열등하고 하나는 탁월한가.’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에게 오랜 세월 불익과고통이 된다.” (A6.44, A10.75)라고 했다.

부처님은 사람에 대해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런가? 사람에게는 다양성이 있기 때문이다.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어느 한면만 보고 판단한다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그 사람의 장점만 보는 것이 안전하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거든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야 한다.

누군가 사람에 대해 평가하려 한다면 그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사람의 성품에 대해 우월과 열등을 말한다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부처나 부처에 버금가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사람을 평가할 자격도 되지 않는 자가 사람의 성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우월감으로 가득한 판사가 판결을 내렸을 때 정확한 판결이라고 보기 어렵다. 치우친 견해를 가진 자가 사람을 판단했을 때 역시 치우친 견해이기 쉽다. 열등감으로 가득한 자가 사람을 판단했을 때 주관이 개입되기 쉽다. 모두다 자신의 성품을 근거로 해서 판단하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사람을 판단하면 불완전한 판단이기 쉽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안전하다. 누가 사람을 함부로 재단하려 하는가?


2021-05-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