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망상 속에서 한시간 보냈지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6. 13:11

망상 속에서 한시간 보냈지만


나는 도인일까?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물어야 창의적이라고 했다. 대답만 해서는 그 자리를 면치 못할 것이다. 자아와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물음, 이것이 있어야 학인이라 할 것이다.

도를 닦고자 한다. 어떤 도인가? 팔정도를 말한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도가 있지만 팔정도만 못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팔정도는 도중의 도이다. 팔정도를 닦는 자는 도인중의 도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제 자극받았다. 전재성 선생 공양모임에서 K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줌모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갈 때와 올 때 카풀해 드렸다. 그 결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어제 모임이 끝나고 퇴계원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차 안에서 약속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한시간은 앉아있기로 한 것이다. 타이머를 이용하여 앉아 있겠다고 했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오늘 일요일임에도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 갔다. 새벽에 생각해 두었던 것을 글로 썼다. 오늘 하루 의무적 글쓰기는 끝난 것이다. 다음으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어제 K선생과 약속한 한시간 앉아 있기에 대한 것이다.

사무실 불을 껐다. 약간 어두컴컴하다. 방석을 반으로 접어 엉덩이를 높였다. 다리는 반가부좌를 했다. 두 손은 배꼽아래에 두고 엄지를 닿을락말락 했다. 눈은 감았다. 이제 가면 된다.

K
선생의 말을 떠 올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붙인다'는 말이 와 닿았다. 이는 사띠가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 부품과 꺼짐에 마음이 붙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망상이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허공에 집을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기가 쉽지 않다. 호흡을 보는 것이 아니다. 배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마하시방식이다. 호흡을 보다 보면 사마타로 들어가기 쉽기 때문이다. 사마타하자고 명상하는 것은 아니다. 오온의 생멸을 보자고 명상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생멸을 보아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생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다. 주의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한다. 부품과 꺼짐 현상을 발견했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때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붙여야'한다. 한번 붙여 놓으면 잘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계속 붙이고 있으면 집중이 잘된다. 그러나 방심하면 망상이 치고 들어 온다. 붙은 것이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다시 붙일 때까지 시도 해야 한다. 이런 싸움을 한시간 내내 했다.

망상이 치고 들어올 때 어제 들은 것도 떠올랐다. 들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문득문득 떠올랐다. 금과 같은 말이다. 명상 하는데 있어서 금쪽같은 말을 들은 것이다. 체험자로부터 들으니 공감하게 된다.

오온의 생멸은 볼 수 있어야 수행의 진전이 있다. 갈애와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탐욕의 뿌리, 분노의 뿌리,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다.

수행을 왜 하는가? 고요를 맛보기 위해 하는 것일까? 앉아 있으면 고요해 진다. 대상에 집중하면 기쁨도 일어나고 행복감도 느낀다. 이런 목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할 때도 느낄 수 있고 운동 할 때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요를 맛보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여 탐욕과 성냄과 같은 불선법을 뿌리뽑기 위함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지금 나에게 욕망이 일어났다. 수행이 된 사람이라면 생멸현상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갈애 하지 않는다. "나에게서 욕망이 일어났구나."라고 아는 것이다. 수행이 안되어 있다면 끄달릴 것이다. 욕망이 하자는 대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괴로움이다. 욕망은 악마의 속삭임과 같다. 분노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불선법의 뿌리를 뽑기 위한 것이다. 잡초의 뿌리를 뽑는 것과 같다. 탐욕의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잡초처럼 자라서 번뇌의 원인이 될 것이다. 수행을 함에 따라 탐욕의 경향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탐욕의 뿌리가 제거되어서 탐욕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탐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를 해탈이라 말할 수 있다.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늘 행복한 상태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윤회에서 해방이다.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수행하는 것이다.

오늘 오전 한시간 앉아 있었다. 스마트폰 타이머에 ""하고 종이 칠 때 상쾌 했다. "내가 해냈다."라고 생각했다. 비록 망상 속에서 한시간 보냈지만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K선생과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눗따라 상가마 위자야(anuttara sa
gāma·vijaya)”(M115), 전쟁에서 위없는 승리자가 되고자 한다.


2021-05-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