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한국불교 불기(佛記)모순 이대로 괜찮은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19. 17:36

한국불교 불기(佛記)모순 이대로 괜찮은가?

 

 

몇 년 전서부터 부처님 탄생일을 두 번 치루고 있다. 마치 구정과 신정을 모두 쇠듯이, 음력 사월초파일에 부처님오신날과 음력 사월보름날에 붓다데이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대승불교 부처님 탄생일이고, 후자는 테라와다불교 부처님 탄생일이다. 일종의 이중과세이다.

 

부처님은 오신 것이 아니라 출현하신 것

 

오늘은 대승불교 부처님 탄생일이다. 음력으로 사월초파일이다. 해마다 오월에 치루어진다. 연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신록에 꽃들은 만발하는 최고의 계절에 부처님이 오신 것이다.

 

부처님을 오셨다고 말한다. 왜 오셨다고 했을까? 아마 그것은 선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이 오시고자 해서 오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에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acchariyaabbhutasutta)’(M123)가 있다. 경을 보면 보살에 대하여 보살이 만족을 모르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어왔다.”(M123)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보살이 도솔천에서 살다가 부처가 될 인연이 되어서 마야부인의 자궁에 입태된 것이다. 그래서 '오셨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출현이다.

 

부처가 출현한 것은 정법의 쇠퇴와 관련있다. 정법이 유지되고 있다면 부처는 출현하지 않는다. 정법이 변질되어서 사라져 버렸을 때 부처가 출현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과거칠불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가 출현한다는 것은 연기법과 관련이 있다. 이는 연기법에 대하여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S12.20)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과거 부처가 출현하면 모두 동일하게 연기법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나는 전생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들이 거닐던 옛길과 옛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S12.65)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다기 보다는 부처님이 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처가 출현할 때 나타나는 현상

 

보살이 자궁에 입태 되었을 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 그것은 빛과 진동으로 나타난다. 오로지 부처가 출현할 때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빛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다.

 

 

보살이 만족을 모르는 신들의 하늘나라 무리에서 죽어서 어머니의 자궁으로 들었을 때에,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

 

 

보살은 사아승지십만겁동안 보살행을 했다. 수없는 생을 살면서 십바라밀을 닦은 것이다. 그것도 목숨걸고 바라밀행을 했다. 그 공덕으로 부처를 이루었다. 보살이 입태 되었을 때 이는 부처의 출현을 의미한다. 대개 빛을 보인다.

 

 

신은 인간과 다른 존재이다. 신은 인간보다 수승한 존재이다. 특히 하느님세계(梵天)의 신이 출현할 때는 빛을 낸다. 이는 벗들이여,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생겨나는 징조들이 보이면,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광대한 빛이 생겨나고 광명이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이 나타나는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D18)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하느님(Brahma)이 출현할 때는 전조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해뜨기 전에 동녁이 밝아 오듯이, 하느님이 출현하면 먼저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왜 빛을 발산하는 것일까? 이는 세계가 괴멸될 때에 대부분 뭇삶들은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 태어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기쁨을 먹고 살고 스스로 빛나고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영광스럽게 살면서 오랜 세월을 지낸다.”(D1.39)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에서 하느님(Brahma: 梵天)은 윤회하는 중생이다. 선정수행을 하여 색계천상에 태어나 하느님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들 하느님들은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들이 출현할 때 먼저 빛이나는 전조 현상이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출현할 때도 빛이 있었다.

 

칠흑의 사이지옥에도 빛이

 

보살은 어머니의 자궁에 입태 되었을 때 측량할 수 없는 빛이 발산되었다. 어느 정도일까? 다음과 같은 빛이다.

 

 

그리고 이 달도 태양도 그와 같은 커다란 신통력 그와 같은 커다란 위신력으로도 빛을 비출 수 없는,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에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 그곳에 태어난 존재들은 그 빛으로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 신들의 위력을 능가하는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빛이 나타났다.”(M123)

 

 

무간지옥에 대한 설명이다. 부모를 살해는 등 무간업을 지은 자들이 우주가 무너질 때까지 갇혀 사는 지옥이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끼어 있어서 빛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를 어둡고 바닥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의 감추어진 세계(lokantarikā aghā asavutā andhakārā andhakāratimisā)”라고 한다. 줄여서 로깐따리까(lokantarikā)라고 한다. 우리말로 사이지옥 또는 간극지옥이 된다.

 

사이지옥에 태어나면 빛이라는 한번도 볼 수 없다. 빛이 없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지 않는다. 시각의식이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없다. 그러나 부처가 출현할 때 만큼은 예외이다. 보살이 입태 되었을 때도 빛을 볼 수 있다.

 

빛이 생겨나면 시각의식도 생겨난다.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된다. 부모를 살해 하는 등 무간업을 지은 존재들이 벗이여, 다른 존재들도 참으로 여기에 태어났다.”라며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는 것이다.

 

보살이 입태되었다는 것은 우주적 사건에 해당된다.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진동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만 세계가 흔들리고 동요하고 격동하면서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우주적 사건 네 가지

 

보살이 입태 될 때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빛과 진동이다. 우주끝까지, 사이지옥에 까지 빛이 비추고, 일만세계가 진동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사건은 오로지 부처가 출현했을 때만 일어난다. 앙굿따라니까야 아주 놀라움의 경(acchariyasutta)’(A4.127)에서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사건을 말하고 있다.

 

 

1) 보살이 만족의 하느님 나라의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몸을 버리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서 모태에 들어갈 때에

2) 보살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면서 모태에서 나올 때에

3)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을 때에

4) 보살이 위없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에

 

 

네 가지 사건은 입태, 탄생, 성도, 초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탄생, 성도, 초전, 열반이라는 네 가지 중에서 열반이 빠지고 입태가 들어 간 것이다.

 

열반했을 때는 어떤 현상이 있었을까? 이는 세존께서 완전한 열반에 완전히 입멸하시자 동시에 몸의 털이 곤두서는 전율을 일으키는 대지의 진동이 일어나고 천둥이 내리쳤다.”(D16.127)라고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 진동은 있었지만 빛은 없었다. 열반은 보살의 입태, 탄생, 성도, 초전과는 달리 입멸에 대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지의 진동과 천둥이 내리 치는 것만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우주적 사건은 네 가지이다. 그것은 부처가 출현했을 때이다. 보살의 입태, 탄생, 성도, 초전 때 측량할 수 없는 빛이 우주 끝까지 뻗치고 일만세계가 진동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비봉산을 넘어 안양사로

 

오늘은 대승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이다. 사월초파일을 맞이하여 절에 갔다. 멀리 가지 않고 지역에 있는 절을 찾았다. 안양예술공원안에 있는 안양사이다.

 

안양사를 가기 위해 산을 넘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출발했다. 관악대로를 건너 레미안아파트를 가로 질러 가면 비봉산에 이른다. 관악산 줄기가 남으로 내려오다 마지막으로 솟구친 산이다.

 

 

날씨는 화창했다. 지난 며칠동안 흐린날이 계속되었다. 며칠째 비가 와서 분위기도 쳐져 있었다. 그러나 비 온 다음날은 언제나 그렇듯이 살맛 난다. 하늘은 청명하고 신록은 무성하고 꽃들은 만발해 있다.

 

숲속 길을 걸으니 그늘길이 되었다. 우거진 나무로 인하여 햇볕이 차단된 것이다. 싱그런 오월의 공기는 맑았다. 비봉산 전망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신록의 산하대지가 펼쳐진다. 암반에 뿌리내린 소나무가 경이롭다. 장쾌한 대자연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안양사 가는 길에 때죽나무꽃이 만발했다. 지금이 때죽나무꽃철인가 보다. 때죽나무꽃이 절정이니 앞으로 일주일 후가 되면 쪽동백나무꽃이 절정일 것이다.

 

 

때죽나무꽃을 보면 순백의 아름다운 신부를 보는 것 같다. 마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연상케 한다. 벚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마 때죽나무꽃만 못한 것 같다.

 

벚꽃은 인공의 냄새가 나지만 산에서 피는 때죽나무꽃은 자연의 미가 넘쳐난다. 순백의 작은 꽃을 보면 마치 밤하늘의 별빛을 보는 것 같다. 때죽나무꽃은 순백하고 순수하고 순정한 신부의 모습과도 같다.

 

안양사에 도착하여

 

안양사에 도착했다. 한시간 반 산행하여 온 것이다. 초파일 분위기가 난다. 나이 드신 노인들이 비틀거리면서 온다. 부축받고 오는 노인도 있다.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 이날 하루만큼은 절에 가고자 했을 것이다. 오늘은 부처님오신날이니까.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면 무엇을 해야 할까? 평소에는 법당에 가서 삼배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날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관불의식이다. 아기부처님에게 목욕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오신날 생각나는 것은 아기부처님 정수리에 물을 부어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관불의식을 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가장 불교다운 장면인지 모른다. 오로지 이날 하루만 하는 것이다. 큰 절이든 작은 절이든 어느 절이든지 관불의식은 빠지지 않는다.

 

관불의식의 유래를 보면

 

관불의식은 왜 하는 것일까? 아기가 태어나면 목욕시켜 준다는 의미에서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경전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관욕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아난다여, 보살이 모태에서 태어날 때에, 하나는 차갑고 하나는 따뜻한 두 가지 물이 공중에서 쏟아져서 그것으로 보살과 어머니가 목욕했다.”(M123.23)

 

 

냉수와 온수가 공중에서 쏟아 졌다고 한다. 주석에 따르면 두가지 물이 공중에서 쏟아진 것은 어떤 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물이 아니라 따뜻한 물은 놀이를 위한 것이고 찬 물은 마시기 위한 물이다.”(Pps.II.184)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 관불에 대한 것을 보면 한국불자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다른 것이다. 관불이라는 것이 아기부처님 목욕시켜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뜻한 물은 아기부처님 목욕물이고, 찬물은 아기부처님이 마실물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온수와 냉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보살은 옆구리가 아니라 자궁에서

 

보살의 탄생을 보면 일반사람들과 다르다. 경에서는 어머니는 보살을 서서 출산하였다.”(M123.19)라고 했다. 그렇다고 하여 어머니의 옆구리로 출산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아쌀라야나의 경’(M93)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계급의 평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네 가지 계급이 평등하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 당시 바라문 계급의 특권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계급은 태생적이 아님을 말한다. 그래서“아쌀라야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요나, 깜보자, 그리고 다른 변경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귀족과 노예란 두 계급이 있는데, 귀족으로 있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로 있다가 귀족이 되기도 한다.’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M93.14)라고 물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 사회는 격변기였다. 그래서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주석을 보면 왕족이나 노예도 수레라는 명칭처럼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왕족이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가 왕족이 될 수도 있는 것으로 계급의 명칭은 단지 사회적인 기능개념 내지는 관념개념일 뿐 계급자체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1691번 각주)라고 설명되어 있다.

 

계급은 태생적인 것이 아니다. 브라만들은 태어날 때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은 브라만의 특권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런데 아쌀라야나여, 그 바라문의 아내에게도 월경, 임신, 출산, 수유가 존재합니다. 이렇게 그 바라문들이 동일한 자궁으로부터 태어났는데도, ‘바라문들이야말로 최상의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저열하다. 바라문들이야말로 밝은 계급이고, 다른 계급은 어둡다. 바라문들이야말로 청정하고, 다른 계급은 그렇지 못하다. 바라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적자이고, 그의 입에서 태어난 자이고, 하느님이 만든 자이고, 하느님의 상속자이다.’라고 말합니까?(M93.12)라며 묻는다. 이렇게 본다면 보살도 자궁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 된다. 왕족계급이라 하여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는 말은 초기경전에서 보이지 않는다.

 

왜 한날에 탄생과 정각과 열반을 기념하는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늘 듣는 말이다. 이 말은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다.”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문구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이다. 이 말은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뜻이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는 이와 다르다.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M123)

 

 

이 빠알리 게송을 접하고 놀랐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탄생게와는 너무나 다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전송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후송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전송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에 해당되는 문구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자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자이다. 가장 뛰어난 자이다.”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가장 뛰어난 자(aggo), 가장 훌륭한 자(jeṭṭho), 가장 선구적인 자(seṭṭho)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Pps.IV.185)이라고 했다. 그래서 탄생게는 정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대승 탄생게의 후송을 보면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탄생게를 보면 열반에 대한 것이다. 이는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라는 문구로 알 수 있다. 이는 잔여가 없는 완전한 열반의 세계(無餘涅槃)’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탄생게는 열반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의 날자가 모두 다르다. 그래서 탄생게는 오로지 탄생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의 날이 일치한다. 그래서 음력 사월보름날에 세 가지를 한꺼번에 기념한다. 이는 사월초파일에 탄생만 기념하는 대승불교와는 대조적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 탄생, 성도, 열반을 한날에 기념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는 빠알리탄생게가 탄생, 성도, 열반을 모두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생게 자체가 탄생에 대한 것이고, 무리 중의 우두머리라는 것은 퇴전할 수 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기 때문에 정각에 대한 것이고, 더 이상 태어남은 없다고 했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것이다.

 

한국불교 불기(佛記)모순 이대로 괜찮은가?

 

빠알리 탄생게는 탄생, 성도, 열반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한다. 이런 이유로 사월보름날에 세 가지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전세계적으로 불기를 보면 열반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올해 불기는 2565년이 된다. 그러나 한국불교에서는 탄생을 기념함에도 불기를 2565년이라고 한다. 이는 모순이다.

 

한국불교에서 올해 부처님오신날 불기는 2565년이다. 이는 세계불교도협의회에 계산방식에 따른 것이다.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불기로 정한 것을 말한다. 불기가 2565년이라는 것은 부처님이 열반한 해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 불기를 부처님오신날에 적용하고 있다. 이는 맞지 않다. 부처님 열반한 해에서 80년을 더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오신날은 불기로 2645년이 되는 것이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탄생과 성도와 열반을 한날에 기념하기 때문에 불기를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하여 2565년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사월초파일 탄생한 날만 기념하기 때문에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하는 2565년을 적용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

 

 

오늘 유튜브에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을 보았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불기 2565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온겨레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의 대광명이 충만하고로 시작되는 봉축사를 말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대승불교의 부처님오신날은 2565년이 아니라 여기에 80년을 더한 2645년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열반한 해를 기준으로 한 불기 2565년을 부처님탄생일이라고 말한다. 이런 모순을 언제 바로잡을 수 있을까?

 

 

2021-05-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