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또다시 버킷리스트를 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4. 06:26

또다시 버킷리스트를 보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6개월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할까?

버킷리스트를 또다시 보게 되었다. 채널을 돌리다가 걸린 것이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보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색다른 느낌이다. 강하게 공감해서일 것이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두 남자가 의기투합해서 불가능할 것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이 있다. 관성대로 작용되는 것을 말한다. 일상에서도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좀처럼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예이다. 별일 없으면 했던 일을 계속하고자 한다. 똑같은 일을 평생하는 것이다.

어느 방송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매일 생방을 하는 방송인은 은퇴하기 전까지 제주도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해 보았다고 한다.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그렇다. 오로지 직장과 가정에만 매여 살다 보면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은퇴해서 간다고는 하지만 그때 가 보아야 한다. 도중에 사고로 죽거나 중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버킷리스트에서 두 남자는 불가능에 도전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탈출해야 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가정이다. 가정에 매여 있는 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직장도 걸림돌이다. 직장에 매여 있는 한 역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시한부 인생 두 남자는 가정과 직장에서 탈출했다. 버킷리스트대로 해 보고자한 것이다. 스카이다이빙, 눈물날 때까지 웃기, 모르는 사람 돕기, 장엄한 광경보기 등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들이다. 큰 꿈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누구나 꿈이 있다. 대부분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정치인이나 학자, 연예인, 스포츠스타를 꿈꾸기도 한다. 공통적으로 이익과 명예와 칭송에 대한 것이다. 만일 6개월 밖에 못산다면 이런 것들이 의미가 있을까? 영화에서 자산가는 시한부 인생이 되었을 때 "지금 나한테 돈이 무슨 소용인데?"라고 했다.

오늘 죽음을 맞이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산해진미의 진수성찬도 먹고 싶지 않을 것이다. 주식이 10프로 올랐다고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대신 진지해 질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면 진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움을 눈앞에 두었을 때 어떤 일을 해야 가치 있을까? 수익을 따지는 일 따위는 무가치한 것이다. 지위를 지켜 내기 위한 것도 쓸데 없는 짓이 된다. 그동안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일에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버킷리스트에 있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 돕기, 장엄한 광경보기, 화해하기 등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를 "껄껄껄"이라고 말한다. "참을껄, 즐길껄, 베풀껄”하며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 버킷리스트는 "껄껄껄"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공포가 될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죽음의 사신이 찾아 온다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죽음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다. 백세시대라 하여 앞으로 수십년 후에 일어날 일이 아니다. 오늘 밤이 될 수도 있다. 잘 산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 감각적 욕망을 즐긴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두렵고 불쾌한 것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평생 베풀고 산 사람들은 덤덤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천국에 가는 조건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자신의 삶이 타인에게도 기쁨을 주었는가?"라는 대사가 있다.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자리이타행이다.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삶을 말한다.

 


사람은 죽음앞에 속수무책이다. 재벌회장도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죽음을 이겨낸 사람도 있다. 아라한에게는 죽음이 없다. 아라한은 무아의 성자이다.

내가 없으면 죽음도 없다. 내가 있으면 죽음도 있다. 유아의 범부는 진짜로 죽지만 무아의 성자는 불사가 된다.

죽음은 오온의 죽음을 말한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자에게는 죽음이 찾아 온다. 그러나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는 성자에게는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말은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범부에나 있는 것이지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은 없다.

불사가 되려면 자신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나에게 6개월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버킷리스트대로 해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과 싸워 보고 싶다. 자신과 싸워 승리한다면 죽음은 있을 수 없다. 죽음은 자아개념이 있는 자에게나 있다. 자아개념이 없는 자에게 어떻게 죽음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환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2021-08-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