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들기

멈출 수 없는 삶의 흔적 남기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4. 16:16

멈출 수 없는 삶의 흔적 남기기

 

 

나는 왜 자꾸 삶의 흔적을 남기려 할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수는 없는 것일까? 자꾸 흔적을 남겨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번에도 삶의 흔적을 남겼다. 제일복사에 의뢰하여 책 세 종류를 각각 두 권씩 총 여섯 권을 만들었다.

 

 

이번에 만든 책은 2012년 담마에 대해서 쓴 글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그리고 니까야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 불교 교리와 교학에 대한 것이다. 책 제목을 차례로 ‘32 담마의 거울 2012 I’, ‘33 담마의 거울 2012 II’, ‘34 담마의 거울 2012 III’으로 붙였다.

 

 

책장에 총 34권의 책이 꼽혀 있다. 이렇게 많은 책을 만들어 낼 줄 몰랐다. 2018 12월 니까야강독모임 글모음 원음향기 가득한 서고의 저녁을 만든 것이 시초이다. 이제 책 만드는 것이 삶에 있어서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아마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될 것 같다.

 

 

이번에 세 종류 여섯 권의 책을 만드는 데 5만원 들었다. 업체를 바꾸니 반 이하로 절감되었다. 한권에 평균 360페이지가량 되는데 만원이 채 안된다. 이정도이면 만족하는 금액이다.

 

수행자는 본래 삶의 흔적을 남겨서는 안된다.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것이다. 마치 딱새 새끼가 때 되면 둥지를 떠나듯이 언제 왔는지 모르게 왔다가 언제 가는지 모르게 가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게송이 있다.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을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Dhp.49)

 

 

법구경 꽃의 품에 있는 게송이다. 게송에서는 수행자를 꿀벌로 비유했다. 꿀벌이 꿀을 딸 때 꽃을 손상시키지 않듯이, 성자가 탁발할 때 재가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을 말한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는 탁발에 의존한다. 탁발자가 많으면 마을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왜 그런가? 꿀벌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벌들은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꽃과 그 색깔이나 향기를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게 벌들은 다니면서 필요한 만큼의 화밀을 빨아먹고 꿀을 만들기 위해 조금 더 취한다. 그리고는 숲속 깊이 들어가 꽃가루가 묻은 화밀을 나무 깊숙이 숨겨진 벌집에 저장하면 그것이 꿀로 변한다. 꽃밭이 있기 때문에, 꽃들이나 그들의 색깔이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것은 자연적 상태로 남아 있다.”(DhpA.I.374)

 

 

중요한 것은 자연적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꽃밭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출가수행승이 탁발 나갔을 때 민폐 끼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을로 탁발 나가야 한다. 최소한 일곱 가구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성자는 탁발할 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꿀벌이 꽃을 건드리지 않고 꿀만 취하듯이 탁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탁발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직 배우는 자[學人]이거나 배움을 뛰어넘은 자[無學]이거나 집에서 사는 자가 아닌 성자는 마을에서 집집마다 탁발하며 다닌다. 그가 마을에 있다고 해서 그 마을의 가정들이 믿음이 적어진다든가 부가 적어지지 않는다. 믿음과 부는 평상시처럼 유지된다. 아직 배우는 성자는 이처럼 마을을 다니다가 그곳을 떠나 물을 얻기 쉬운 마을 밖에 한 장소에 가사를 놓고 그 위에 앉는다. 그리고 모아온 탁발음식을 차축을 돌게 하는 윤활유나 상처를 치유하는 붕대나 아들의 고기처럼 바라본다.”(DhPA.I.375)

 

 

탁발해도 믿음이 적어지거나 부가 적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매일 탁발자가 다녀간다고 해서 싫어 하거나 재산이 거덜나지 않음을 말한다. 왜 그런가? 몸을 유지시킬 정도로 최소한의 먹거리로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몸에 기름칠하는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음식을 대할 때는 아들고기를 대하듯하라고 했다.

 

탁발자는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음식을 골라 먹는다면 음식을 즐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는 어떤 사람이 치료가 될 때까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듯”(S35.239)먹으라고 했다. 음식을 약으로 알고 먹으라는 것이다. 또한 짐을 옮길 수 있도록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듯”(S35.239)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이는 몸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함을 말한다. 이렇게 했을 때 음식을 즐기는 것으로 먹을 수 없을 것이다.

 

탁발은 음식을 빌어먹는 행위이다.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일까? 이는 빌어먹고 사는 것이 가장 청정한 삶이기 때문이다. 만약 출가자가 먹을 것을 저장해 놓고 산다면 이는 소유가 된다. 그래서 테리가타에서 소녀 로히니는 수행승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하여 창고에도 항아리에도 바구니에도 자신의 소유를 저장하지 않고 줄 준비된 것 만을 구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그들이 사랑스럽습니다.”(Thig.283)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리된 음식만 탁발함을 말한다.

 

조리되지 않은 곡물을 받는다면 이는 저장하는 것이 되고 소유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탁발자는 그날 조리된 음식만 얻어서 먹는다. 그 다음날 먹을 것은 그 다음 날 가 보아야 한다. 마치 동물이 그날 음식만 취하는 것과 같다.

 

동물은 음식을 따로 저장하지 않는다. 수행승도 음식을 따로 저장하지 않는다. 음식을 구하지 못하면 굶어야 한다. 음식을 구하면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모여서 함께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는 약으로 먹어야 하고 윤활유로서 먹어야 한다. 또 하나는 아들고기 먹는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차축의 윤활유나 상처의 붕대처럼 여기는 것은 음식을 먹는 목적을 상기하는 것이고 아들의 고기는 음식의 비통함을 상기하자는 것이다.”(DhPA.I.375)라고 했다.

 

아들고기를 먹는 비통한 심정으로 음식을 먹으라고 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아들고기의 경’(S12.63)에 근거한 것이다. 사막을 건너던 부부가 아들이 죽자 아들고기를 먹으며 사막을 건넜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아들고기를 먹을 때 음식을 즐기듯이 먹지 못할 것이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양분을 취하기 위해 먹은 것이다. 탁발음식을 먹을 때도 늘 아들고기를 생각하라고 했다. 부부가 아들고기를 먹는 심정으로 먹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놀이 삼아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취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진수성찬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그들은 영양을 위해서 자양분을 먹을 수 있는가?”(S12.63)라며 늘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는 것이다.

 

음식을 접할 때 대부분 즐기며 먹는다. 또 술과 함께 먹을 때는 취하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아들고기를 생각한다면 그렇게 먹을 수 없다. 비통한 심정으로 먹어야 한다. 몸을 유지시키기 위해 약으로 먹고 기름칠하는 정도로 먹어야 한다. 음식을 즐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성자가 탁발할 때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고 했다. 신심도 떨어뜨리지 않고 재물도 축나게 하지 않는다. 있는 듯 없는 듯 탁발 다니는 것이다. 마치 벌이 꽃에서 필요한 꿀만 취하고 꽃과 향기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무소유와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사향사과와 열반을 성취할 것이다.

 

성자가 탁발하는 행위와 꿀벌이 꿀을 만드는 행위에는 유사성이 있다. 성자는 있는 듯 없는 듯 살며 재가자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마치 호수에 막대기로 금을 긋는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마치 새가 날아 갈 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쌓아 모으는 것이 없고

음식에 대하여 완전히 알고

있음을 여의고 인상을 여의어

활동영역에서 해탈한 님들,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들의 자취를 찾기 어렵다.”(Dhp.92)

 

 

오늘도 삶의 흔적을 남겼다. 매일 글을 쓰는 것은 삶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더구나 책으로 만들었다. 오늘 세 종류 여섯 권의 책을 찾아서 한질은 사무실 책장에 진열해 놓았고, 또 한질은 아파트 거실 장식장에 진열해 놓았다. 이는 과시용이다. 마치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라고 알리는 것과 같다.

 

성자는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있는지 없는지 살아 간다. 그래서 “바보처럼, 벙어리처럼 자신을 드러내야 하리. (Thag.582)라고 했다. 잘난 체하지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 이는 “눈 있는 자는 오히려 눈먼 자와 같고, 귀 있는 자는 오히려 귀먹은 자와 같아야 한다. 지혜가 있는 자는 오히려 바보와 같고 힘센 자는 오히려 허약한 자와 같아야 한다.”(Thag.581)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매일매일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배겨 날 수 없다.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글쓰기에 중독된 것 같다. 더구나 이제 책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도 자랑하고 있다. 이런 자랑은 언제 끝날까? 이런 삶의 흔적은 언제까지 남겨야 할까? 분명한 사실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중독일 것이다.

 

 

2021-10-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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