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유의 행복과 향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눈부처학교가 어제 개강했다.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주최하는 연중행사를 말한다. 매년 한차례 열리는 배움의 마당이다. 올해는 ‘코로나 이후 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길찾기’라는 주제로 5주에 걸쳐서 다섯 차례 모임이 있다. 그 첫번째 모임이 어제 12월 2일 저녁 7시에 줌으로 열렸다. 올해의 경우 신대승네트워크와 공동으로 개최했다.
사람들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요즘은 평생배운다고 하여 평생학습기관이 대학마다 있다. 심지어 동네에서도 볼 수 있다. 동네 주민센터에서 열리는 강좌가 이를 말한다.
불교인들에게도 학습기회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여러 불교단체에서 해마다 수많은 강좌가 열린다. 정평불에서 주최하는 눈부처학교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이다.
왜 눈부처라고 했을까? 이렇게 생각해 본다. 상대방의 눈동자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내가 있으면 상대가 있음을 말한다. 나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법이다. 연기송 정형구 “이것이 있어서 저것이 있다.”라는 말처럼, 상대방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연기적 존재이기에
나는 로빈슨 크로소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나는 자연인 같은 존재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도움을 받고,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간다. 상호의존적이다. 이는 다름아닌 연기적 삶이다.
사람이 고립되어 살면 외롭다. 아무 움직임이 없이 외롭게 고립되어 살았을 때 사람이 이상해질 수 있다. 접촉이 없으면 자신의 세계에 빠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나홀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심산유곡에서 신선처럼 살아 가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밥은 먹어야 할 것이다. 쌀이 있다면 누군가 농사지은 것이다. 생필품이 거기에 있다면 여러 사람의 노고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나홀로 호의호식하며 잘사는 것은 차라리 죄악에 가깝다.
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연기와 사회적 연기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주로 개인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오온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개인적인 연기만을 말씀하지 않았다. 이는 자리이타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나홀로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이는 대단히 이기적이다. 주변사람들의 도움이 있어서 여기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자리이타적 삶이야말로 최상의 삶이라고 했다.
자리이타적 삶은 사회적 실천으로 완성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참여일 것이다. 자신을 여기에 있게 한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다.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사회적 실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2021년 눈부처학교 첫번째 모임의 주제는 ‘불평등의 극대화와 민생의 위기와 대안’에 대한 것이다. 성공회대 박승호 선생이 강의했다. 주로 자본주의 문제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여러가지 자료와 데이터를 근거로 하여 자본주의가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박승호 선생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자세한 내용은 미리 배포된 pdf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유튜브에 공개되는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승호 선생은 “21세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라고 말했다.
박승호 선생은 학교에서 자본론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본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를 들고 있다. 그렇다고 과거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를 21세기에 맞는 사회주의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박승호 선생은 21세기 사회주의는 불교적 세계관과도 가까운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폐해가 극에 달한 요즘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되고 있다. 이대로 계속 가면 공멸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있다. 그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기후위기를 들 수 있다.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사람들로 비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질까봐 걱정하고 땅이 꺼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로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될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큰 위기가 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모습이 마치 청정도론에서 본 ‘로까뷰하(世莊嚴)’를 연상케 한다.
어느 날 거리에 머리를 산발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비참한 모습을 하고서 미래를 말했다. 세상이 멸망할 것을 말하면서 “여러분, 세상에 종말이 옵니다. 자애를 닦으십시오.”(Vism.13.34)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천상에서 온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살 때 겁화가 일어나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미래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청정도론에서 본 로까뷰하가 떠올려 진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겁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있다. 탐욕이 치성하면 불에 의해서 세상이 모두 타 버릴 것이라고 했다. 마치 기름이 타면 검댕이 하나 남기지 않듯이 하늘에 일곱 개 태양이 뜨면 그 불로 인하여 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우주의 성주괴공에서 괴겁기에 해당된다.
박승호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현재 인류는 어쩌면 괴겁기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관련이 있다. 탐욕이 치성한 요즘 자본주의의 온갖 폐해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투기도 생산적인 활동일까?
질의응답시간이 있었다. 참여자 중의 한사람은 불로소득과 생산력에 대해서 질문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주식과 비트코인에 열광한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투기를 잘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심지어 밤샘연구하는 것도 생산과 관계되는 것인지 물은 것이다.
주식을 하지 않는다. 비트코인은 개념도 없다. 그러나 요즘 젊은 세대는 주식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비트코인도 잘 한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잘하려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부동산투기 등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긴 자들이 있다. 어쩌면 사회전체가 투기 광풍에 휩싸여 불로소득을 바라는지 모른다. 그런데 투기도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를 해야 함을 말한다. 투기하는데 들어가는 노력과 시간도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지금도 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인쇄회로기판 설계를 하면 수천, 수만번 클릭해야 한다. 마치 호미를 들고 밭 가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이 생산적인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주식, 비트코인, 부동산 투기를 잘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생산적인 활동으로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승호 선생은 단호하게 “자본주의의 병적 폐해입니다.”라고 말했다.
탐욕에 기반한 자본주의
주식과 부동산은 주기가 있다. 십년주기설 같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박승호 선생은 주기적 경기순환이라고 했다. 특히 투기가 극성일 때는 경기가 과열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부동산이 폭등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70년대나 80년대, 90년대 때도 폭등 현상이 있었다. 노무현정부 때 부동산 폭등은 절망적인 것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부동산 폭등이 문재인 정부에서 나타났다. 요지에 아파트를 가진 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를 바라보는 집 없는 사람이나 젊은 사람들 심정은 어떠할까?
박승호 선생에 따르면 부동산폭등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금융위기 이후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고 한다. 또한 코로나 펜데믹 기간동안 갈 곳이 없는 돈이 부동산으로 몰린 이유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동산 폭등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현정부가 부동산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요즘 젊은 세대는 절망의 세대 같아 보인다. 지금의 50-60대는 완전고용시대와 성장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집이라도 하나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는 20-30대 젊은 세대는 자포자기하는 것 같다. 평생 벌어도 집을 마련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큰 것 한방을 노리는 것 같다. 그것은 주식이다. 특히 비트코인이다. 이는 탐욕에 찌든 자본주의 병적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문제만 제기해서는 안된다. 대안도 내놓아야 한다. 박승호 선생에 따르면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인류를 공멸로 이끌고 있다고 했다. 이는 자본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탐욕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유지족(吾唯知足)
결국 탐욕이 문제가 된다. 청종도론에서는 겁화가 일어날 때는 탐욕이 치성할 때라고 했다. 옛날에 현자들이 말한 것과 딱 들어 맞는다. 이렇게 본다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간단하다. 탐욕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소욕지족이다.
소욕지족은 대표적인 불교적 가치관이다. 법구경에서도 “어떠한 것이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Dhp.331)라고 했다. 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는 탐욕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소욕지족에 대하여 “이 가르침은 욕심이 없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욕심이 많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A8.30)라고 했다.
소유만을 바란다면 행복지수는 낮아 진다. 소유는 그대로 놓아두고 욕망을 줄인다면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소유가 아니라 지족이다. 그래서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고 했다.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라는 뜻이다.
소욕지족이라고 하여 나홀로 신선처럼 살 수 없다. 나홀로 산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고 살지 않을 수 없다.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이익되고 타인도 이익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자리이타행이자 동시에 사회적 실천이다.
소유의 행복과 향유의 행복
어떻게 해야 사회적 실천을 잘 할 수 있을까? 부동산 투기 등으로 불로소득을 챙겨서 호의호식한다면 비난받을 것이다. 이런 때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답이다. 박승호 선생은 불교에도 길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과 같은 소유의 행복과 향유의 행복이 대안이 될 것 같다.
“장자여, 향유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장자여, 세상의 고귀한 가문의 아들은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 그는 이와 같이 ‘나는 근면한 노력으로 얻고, 완력으로 모으고, 이마의 땀으로 벌어들인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을 향유의 행복이라 한다.” (A4.62)
세상 사람들은 돈벌기 선수가 되어 있는 듯하다. 돈버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도 돈 버는 삶에 올인한다. 여기에 탐욕이 개입되면 허황된 욕심이 생겨난다. 큰 것 한방을 노리고 투기하는 것이다. 이른바 불로소득을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도 실력이라고 말한다. 주식하는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생산적인 활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산적은 활동은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경에서처럼 팔뚝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이루어진 성과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이라고 했다.
팔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이루어진 재물은 정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재물을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써버린다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가진 것을 베풀고 나눌 때 진정한 소유가 된다. 그래서 “정당한 원리로 얻어진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푼다.”라고 했다.
자존의 삶을 위하여
소유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 돈을 소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자존감 없는 삶이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세상에는 나보다 돈이 많은 자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지금 10억 가진자가 20억 가진자를 생각한다면 자존감이 낮아질 것이다. 이 세상에 최고로 부자 한사람 빼고 모두 자존감이 낮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화폐에서 가치로 바꾸면 자존의 삶을 살 수 있다. 비록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산다면 자존 있는 삶이 된다.
많이 소유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탐욕을 줄였을 때 만족한 삶을 산다. 더 좋은 것은 베풀고 나누는 삶이다. 적게 소유한 자도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았을 때 이를 ‘향유의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다름아닌 소유의 행복이다.
베풀고 나누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다. 이것이 자리이타행으로 최상의 삶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존의 삶이 된다. 나는 소유의 행복과 향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2021-12-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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