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올 한해 많은 일을 했지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31. 08:47

올 한해 많은 일을 했지만


어제 타 놓은 꿀물을 마셨다. 수천개의 미각세포가 동요한다. 찌뿌둥한 몸 상태를 제압하는 것 같다. 마치 조미료가 들어가면 맛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새벽이다. 고요하고 어둡다. 밖은 엄동의 날씨이다. 영하 10도 된다하니 아무리 방한을 해도 뼈속까지 파고 드는 추위에는 당할 자 없다. 그러나 아파트 방안에 있으면 추운 줄 모른다.

올해도 끝자락이다. 매년 12 31일이 되면 파장분위기가 난다. 마치 학교가 파하는 것 같다. 시장이 파하는 것 같다. 인생도 파장인 것 같다. 인생의 끝자락에 이른 것 같다. 죽음의 침상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 같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마치 시험을 끝낸 학생 같은 기분이다. 3때 예비고사를 마쳤을 때 "좀 더 잘할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좀더 시간이 있었더라면"이라며 아쉬워했었다. 한해 더 공부하면 점수를 대폭 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올해 끝자락에 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다. 오늘로서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벽에 이른 것 같다. 더 나아 갈 수 없는 막장에 이른 것 같다. 마치 사형수가 사형집행장으로 끌려 가는 것 같다.

더 나아갈 수 없다. 앞은 꽉 막혀 있다. 한발 더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이다. 시간의 추적자는 쫓아온다. 끝자락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즐겨야 할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누가 만든 말인지 알 수 없다. 절망적 상황을 어떻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포기의 미학을 말하는 것일까? 아무런 희망이 없을 때 괴로움은 극에 달한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절망속에 희망이 있는 것일까?

절망에 이르면 포기하게 된다. 죽음의 침상에 누워 있는 자는 희망이 없다. 삶의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지 않을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이라면 오히려 기대가 있지 않을까?

오늘은 마지막 날이다. 마치 죽음을 앞 둔 자와도 같다. 임종의 순간에는 지나온 세월이 파노라마친다고 한다. 나의 지난 일년은 어땠을까?

일감이 있으면 일을 했다. 일을 할 때 마다 계산서를 발행한다. 전자세금계산서를 말한다. 그리고 철 해 둔다. 매출과 매입, 그리고 주문서 철을 보니 묵직하다.

 

 


매출계산서 철은 125장이고, 매입계산서 철은 99장이다. 최대 고객사 L사 발주서 철은 150장이다. 이 밖에도 수많은 모델을 설계했다. 인쇄회로기판(PCB)을 설계한 것이다.

수천, 수만번 클릭해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그러나 오로지 고객 한 곳 만을 위한 것이다. 작업한 것은 고객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번 돈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으나 서류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남는 것은 기록밖에 없는 것 같다. 내 이럴 줄 알고 열심히 썼다. 틈만 나면 썼다. 두세시간 여유가 있으면 "글 하나 나오겠는데?"라며 썼다. 그렇게 쓴 글이 올 한해 744개이다. 의미 있고 형식을 갖춘 글을 쓰고자 했다. 그래서 기, , , 결의 긴 글이 되었다. 하루에 두 개꼴로 썼다.

과거에 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41권 만들었다. 블로그에 있는 글을 다운 받아 만든 것이다. 이제 2012년 것 작업하고 있으니 언제 다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도 일이다. 편집을 하고 목차를 만든다. 서문을 쓰면 책처럼 보인다. 한달에 서너권 만드니 달이 가면 갈수록 책장을 채울 것이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동 걸었다.

 


경 외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올해 법구경 찟따왁가(마음의 품)를 외웠다. 이어서 죽음명상 다섯 게송도 외웠다. 그리고 최근 십이연기분석경을 외웠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다. 들려줄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정신적 재물이다.

일과 글쓰기와 경외우기, 올 한해 이 세 가지를 했다. 해마다 늘 하는 일이다. 잠시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자 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번뇌가 있기 때문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글을 많이 써도, 아무리 경을 많이 외워도 탐, , 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뿌리를 뽑지 못했기 때문이다.

탐욕에는 뿌리가 있다.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아무리 싹을 잘라도 스멀스멀 올라 온다. 성냄의 뿌리도 그렇고 어리석음의 뿌리도 그렇다. 경계에 딱 맞닥뜨리면 알 수 있다.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다. 번뇌를 피하고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십년 동안 도를 닦은 자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오면 한방에 무너질 수 있다. 탐욕의 경계나 성냄의 경계에 부딪쳤을 때 무너진다면 헛공부한 것이 된다.

어떻게 해야 탐, , 치의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부딪쳐 보아야 한다. 그리고 깨져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도닦기에 사람 사는 세상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도는 산중 암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저자거리에 있는 것이다.

 

올해도 끝자락이다. 일도 많이 했고 글도 많이 썼다. 경도 외우고 책도 수십권 만들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도 많다.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났기 때문이다. 너무 편하게 살고자 한 것 같다. 주말 되면 사람 만나는 날로 정해야 하겠다.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야 하겠다.

 


많은 일을 했지만 여전히 불만이다. 명상수행을 만족할 만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계에 부딪치면 처참히 깨진다. 그럴 때는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번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는 없다.
단지 사실(dhamma:
)만이 일어난다."(Vism.18.20)


2021-12-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