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욕망을 추구한 대가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2. 08:39

욕망을 추구한 대가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
도는 세샹 속에 있다." 이렇게 썼더니 어느 스님이 "도는 세상 속에도 있고 산중에도 도가 있다."라며 댓글 달아 놓았다.

도는 저자거리에도 있고 심산유곡에도 있다. 그럼에도 사람 사는 곳에 도가 더 있기 쉽다. 왜 그런가? 희로애락이 있기 때문이다.

도란 무엇일까? 도가도비상도 할 때 그런 도일까? 도는 다름 아닌 법이라고 본다. 도는 담마이다. 고유한 성질과 보편적 성질을 갖는 구경법이 도인 것이다. 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 세상에서의 도를 말한다.

유튜브에서 어느 스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기를 보아주었는데 두 시간 만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기 키우는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 스님은 유튜브에서 현재 자신의 삶이 매우 만족하다고 했다. 젊은 스님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의 삶에 대해 동정했다.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친구들을 보면 불쌍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젊은 스님은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의 포기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대가는 무척 컸던 것 같다. 고래등 같은 선원에서 의식주 걱정없이 정진에만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아마 전생에 수행자였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여기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도 포기하고 친구도 포기하는 출가의 길을 갔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욕망의 포기이다.

전생에 무탐, 무진, 무치 수행한 자가 현생에서도 수행자로 살아 가기 쉽다.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볼 수 있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다고 했다. 이를 생이지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생이지자가 아닌 자들은 욕망으로 살아가기 쉽다. 대부분 탐, , 치로 살아간다. 그결과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겪는다. 어느 정도일까? 상윳따니까야 15번 상윳따를 보면 사대양의 물로 비유했다. 윤회하면서 흘린 피가 사대양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존재는 왜 윤회할까? 그것은 명백하다. 무명과 갈애 때문이다. 물론 경전을 통해서 안 것이다. 경전에서는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S15.1)라는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다.

"
그대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도둑으로 살면서 마을을 약탈하다 사로잡혀 목이 잘려 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S15.13)

윤회하면서 흘린 피가 사대양보다 더 많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대양은 지구의 사대양이 아니다. 수미산을 에워싸고 있는 사대양을 말한다. 불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으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에 대한 것이다.

15
번 상윳따에서는 눈물도 우주적 스케일이다. 그래서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짓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S15.3)라고 말씀하셨다.

눈물경에서는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이 사대양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젖경에서는 윤회하면서 먹은 어머니의 젖이 사대양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욕망을 포기한 자들은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전생에 우주적 스케일의 괴로움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다시는 끔찍한 괴로움을 겪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된 자들은 전생의 끔찍했던 기억을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다. 똑같은 실수를 매생마다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제 그만 하자고 했다.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

부처님은 세상을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사대양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렸다면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사대양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고, 사대양보다 더 많은 젖을 먹었다면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염오하고 싫어 하여 떠나라고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말한다. 그 세상을 염오하고 싫어하여 떠나라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욕계의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욕망으로 형성된 세상을 말한다.

 


부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부터 그랬다. 그런데 부자가 되겠다는 욕망 하나만 포기해도 세상 살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성냄, 질투, 후회 등 불선법을 포기하면 어떨까?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상태일 것이다.

열반은 어떤 상태일까? 여러가지로 설명되지만 탐, , 치가 없는 상태가 열반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순간 탐, , 치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라면 최상의 행복을 구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새벽에 이렇게 엄지치기 하는 것도 최상의 행복이다.

일과가 시작되면 최상의 행복은 깨진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 결과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겪을지 모른다. 그러나 심산유곡에서는 고통이 일어날 건덕지는 없을 것이다.

나홀로 사는 사람에게 괴로움은 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저자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괴로움의 다발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다. 참고 견디어야 한다. 싫다고 하여 훌쩍 떠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살면 자연스럽게 인욕바라밀의 삶을 살게 된다.

사람들은 전생에서 했던 것을 똑같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욕망으로 살기 때문이다. 갈애에 묶여 있는 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겨야 할까? 그러기에는 욕망의 대가가 너무 크다. 그러나 배우는 것도 많다. 다시는 세싱에 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아들 라훌라에게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멀리 떠나라”(stn340)라고 말했을 것이다. 욕망을 추구한 대가로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겪는다.

"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0)


2021-01-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