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1. 4. 08:22

()처럼 아름답게 부서져라!


오늘 새벽 행선을 했다. 평소 같으면 지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글을 썼을 것이다. 스마트폰 엄지치기를 말한다. 오늘은 달랐다. 암송한 다음 곧바로 행선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발이 짝짝 달라붙는 것 같았다. 집중이 잘 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경이나 게송을 암송하는 것이다. 마치 주문 외듯이 경을 암송한다. 지금은 십이연기분석경이다. 이전에는 죽음명상 다섯 게송이었고, 그 이전에는 법구경 찟따왁가였고, 또 그 이전에는 팔정도분석경을 암송했다.

십이연기분석경은 1,543자에 달한다. 이 많은 글자를 어떻게 다 암송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지만 부딪쳐 보면 가능하다. 거울처럼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모든 글자를 한꺼번에 떠오르게 할 수 없다. 암송하다 보면 다음 구절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다음 단어가 착착 달라붙는다.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면 가능하다.

십이연기분석경 1,543자는 암송하는 데 10여분 걸린다. 천수경 암송하는 시간과 비슷하다. 다만 뜻을 알고 암송한다. 빠알리 단어의 의미를 알고 암송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를 수천, 수만번 하면 도통할 것이다.

장인이 되려면 반복숙달해야 한다. 요즘 말로 달인은 눈감고도 한다. 수천, 수만 번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이나 게송을 암송하는 것도 수행이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수행이라 본다. 왜 그런가?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반복하면 숙달된다.

장인을 영어로 마스터라고 한다. 요즘 TV에서는 달인이라고 말한다. 생활의 달인이다. 달인, 장인, 마스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분야에 있어서 프로페셔널, 즉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전문가가 되려면 같은 행위를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야 한다. 아니 수천, 수만 번이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 도가 트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달인, 장인, 마스터는 도인이다. 도사가 되는 것이다.

도사가 되고자 한다. 글쓰기는 두려움이 없다. 매일 쓰기 때문이다. 요즘엔 하루에 두 개도 좋고 세 개도 좋다. 이렇게 새벽에 엄지치기도 한다. 이런 세월을 십여년 살아왔다. 글쓰기를 수천 번 한 것이다. 나는 글쓰기 도사일까?

글쓰기로 그쳐서는 안된다.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은 욕망이 개입된 것이다. 수행이 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러나 내려 놓기가 쉽지 않다. 마음의 번뇌가 있는 상태에서 좌선을 하면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행선을 먼저 해야 한다. 행선으로 형성된 집중의 힘으로 좌선에 임할 때 훨씬 잘 되는 것이다.

좌선을 하기 위해서 먼저 행선을 한다. 가벼운 몸풀기 과정도 된다. 그러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잡념이 일어나는 것이다. 잡념을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암송 보다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경이나 게송을 암송하면 집중된다. 수백 번 외운 것이 자동으로 척척 떠오를 때 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오로지 경이나 게송의 문구와 의미만 떠 오르게 된다.

경이나 게송을 암송하면 힘을 받는 것 같다. 십이연기분석경 1,543자를 다 암송하고 나면 성취감에 뿌듯한 마음이 된다. 이번에도 해낸 것이다. 그래서 마치고 나면 "사두! 사두! 사두!"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온다.

기쁨은 나누라고 했다. 나누면 배가 되는 것이다. 재물을 나누면 줄어든다. 그러나 정신적 재물을 나누면 늘어난다.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점점 더 많이 늘어난다. 경이나 게송을 암송하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새벽 십이연기분석경 1,543자를 외우고 회향했다. 암송의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이다. 먼저 선망부모님께 회향했다. 그리고 유주무주 고혼들께 회향했다. 또 모든 존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십이연기분석경을 암송하고 나자 기분이 고양되었다. 진리의 말씀을 한구절 한구절 새기며 암송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분을 행선으로 옮겨 갔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된 마음을 행선에 적용했다. 발이 짝짝 달라붙는 것 같다. 발을 들 때도 알아차림이 있고, 발을 옮길 때도 알아차림이 있다. 몇 번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계속 반복해야 한다. 마치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

행선이 잘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집중이 잘 된다는 말과 같다. 발의 움직임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음을 말한다. 우주에서 오로지 행위와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번뇌에서 자유롭게 된다. , , 치 등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 욕망의 마음이 없을 때 편안하다. 번뇌가 없을 때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암송할 때, 행선할 때, 좌선할 때 마음이 대상에 집중된다. 그렇게 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맛에 수행할 것이다.

평온한 마음이 최상이다. 암송, 행선, 좌선을 하면 평온한 마음이 된다. 그런데 평온과 유사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덤덤한 마음이다. 이것도 일종의 평온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무덤덤한 마음은 언제 깨질지 모른다. 심심하다고 느낄 때 깨질 수 있다. 즐길거리를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송, 행선, 좌선으로 형성된 평온은 다르다. 나태나 권태 등으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사띠(sati)가 있기 때문이다.

사띠란 무엇인가? 요즘 마음챙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적절한 말은 아니다. 사띠는 기억(memory)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기억한다는 말인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한 가르침을 실천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력에서 사띠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사띠를 새김으로 번역했다. 기억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오래 전에 행한 일"이라는 문구에 주목한다. 이는 가르침을 실천하여 체험한 것이다.

수행을 하면 체험을 하게 된다. 일시적으로나마 기쁨, 행복, 평온을 맛보게 된다. 이 맛에 암송을 하고 행선을 하고 좌선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는 다름아닌 좋았던 기억이 될 것이다.

좋았던 체험을 떠올리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가르침을 암송하는 것도 당연히 사띠에 해당된다. 어쩌면 암송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띠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암송은 기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일 암송한다. 요즘은 십이연기분석경 1,543자를 암송한다. 새벽에도 암송하고 오전 일과 중에도 암송하고 오후에도 잠시 짬을 내서 암송한다. 특히 좌선하기 전에 암송하면 효과적이다. 암송으로 인한 집중된 힘을 고스란히 좌선으로 가져갈 수 있다.

좌선에 임하기전에 예비수행으로 암송하면 효과적이다. 행선도 그렇다. 막바로 행선에 들어가기 보다는 먼저 암송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암송은 행선의 예비수행이 된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암송을 하고 난 다음 행선을 하면 효과적이다. 암송으로 형성된 집중된 마음과 기쁨을 그대로 행선으로 옮겨 갈 수 있다. 그 결과 집중이 쉬워진다. 한발을 딛을 때 느낌을 알아차릴 때 그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번뇌가 일어날 수 없다.

명상하는 사람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행선도 이에 못지 않다. 행선하면서 한발 한발 옮길 때 고귀한 자가 되는 것 같다.

 


미얀마 선원에서는 아줌마도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이는 기도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이다. 번뇌에서 벗어 나는 길을 가는 것이다.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

수행도 단계가 있다. 생멸의 단계에 이르면 상당히 진척된 단계로 본다. 오온의 생멸을 말한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 생멸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행선할 때도 생멸을 볼 수 있다.

행선할 때 발을 든다. 그리고 나가서 내리고 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알아차림의 대상이 된다.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면 도가 튼다.

같은 행위를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면 마스터가 된다. 행선 할 때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면 어느 순간 도가 틀지 모른다. 이는 이해 차원이 아니다. 몸으로 숙달되어 얻어지는 것이다.

도사가 되려면 무의미해 보이는 행위를 수천, 수만 번 반복해야 할 것이다. 생활의 달인처럼 눈감고 던져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선이나 좌선을 수백, 수천, 수만 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부서질 날이 있지 않을까? ()처럼 부서지는 것이다. 고운 옥이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 느낌도 그럴 것이다.

부처님은 '포말의 경'(S22.95)에서 느낌은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했다. 통증도 물거품 같은 것이다. 통증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난다여,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지고야 마는 것, 사라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소멸하면 소멸이라고 말한다.”(S22.21)

생멸의 단계를 지나면 소멸의 단계가 된다. 오온이 부서지는 것만 보이는 단계의 지혜를 말한다. 나도 그럴 날이 올까? 옥쇄(
玉碎)하는 날을 말한다. 옥처럼 산산조각 나서 부서지는 것이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라!


2022-01-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