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1. 12. 09:13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글쓰기와 게송암송, 그리고 좌선은 일상이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허무가 엄습한다. 감각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글쓰기는 의무적이다. 매일 장문의 글을 쓴다. 요즘에는 편안한 자세로 엄지로 쓴다. 생각한 것을 엄지로 치다 보면 화면에 팍팍 꼽힌다. 두 시간가량 몰입하다 보면 A4로 세 쪽 분량의 글이 완성된다. 페이스북에 먼저 공유하고 동시에 블로그에도 올린다.

블로그는 나의 글 창고와도 같다. 어느 글이든지 한번 써 놓으면 버리지 않는다. 나의 삶의 역사가 담겨 있다. 나중에 글을 모아 엮으면 책이 된다. 현재 과거 쓴 글을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새로운 일거리를 만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거리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은 이것 밖에 없다.

게송외우기를 하면 상쾌하다. 애써 외운 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송한다. 게송외우기 할 때는 긴장된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의 고삐를 죌 수 있다. 마음은 조금만 방심해도 대상에 가 있다. 대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기 쉽다. 정치 이슈와 같은 시류에 휩쓸리면 마음은 심하게 동요된다.

좌선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호흡을 따라가며 복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느 순간 편안할 때가 있다. 오래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마음이 들떠 있으면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특히 저녁에 그렇다. 흙탕물과 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 그런 것이다. 좌선은 남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무실 한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다 보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고 게송을 암송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수행에 대한 것이다. 자신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타인도 이익되게 해야 한다. 글을 쓰는 것도 타인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의 생각보다는 경전이나 주석문구를 인용하는 것이 훨씬 도움될 것이다.

내가 좋은 것은 남도 좋은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글쓰기는 자리이타행이 된다. 나에게도 이익되고 타인에게도 이익되는 것이다. 글을 통해서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것이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장문의 글이 시간을 빼앗는 시간낭비가 되어서는 안된다. 마음을 울리는 글을 써야 한다. 한문구라도 기억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문구만한 것이 없다. 또 하나는 수행자의 글이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이야말로 지혜에 대한 것이다. 검색해서 찾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수행으로 얻어진 글이야말로 지혜의 보물창고와도 같다. 어제 빤냐완따 스님이 카톡으로 보내 준 글도 그렇다.

어제 새벽에 성찰과 관련된 장문의 글을 엄지로 쳤다. 블로그에 써 놓은 글도 인용했다. 이런 글 저런 글 모아서 주제에 맞게 편집한 것이다. 이를 스님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내왔다.


호흡과 함께 의식이 깨어있는 모든 시간은 수행하는 시간입니다.

수행하면 흔히 사띠수행을 떠올립니다. 사띠를 운전수에 비유하곤 하지요. 대상을 잊지않고 놓치지 않다보면 분명한 앎이 생겨나고, 이후 분명한 앎과 함께하는 사띠가 가능해 집니다. 이때부터는 <> 대신 <>이란 말을 쓰게 됩니다. 대상을 통상적 개념이 아닌 지혜로서 본질을 볼수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생기게 하는 사띠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띠 사띠 하다보니, 사띠가 수행의 거이 모든 것이 되어버린 듯해 보입니다.

불교수행은 사띠만으로는 결코 구현해 낼수 없는 복합수행 입니다. 열반행열차의 핵심부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불교수행은 사띠를 기본 축(여러 축의 하나)으로 닦아나가는 팔정도, 계정혜 수행입니다.

하루종일, 혹은 삼백예순날 우리가 삼빠잔나 사띠만 될수 있다면 더이상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중생계(출가수행활 포함)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축인 바른노력이 함께하는 바른생각으로 몸과 마음(일상에 대한 인식)을 살피고, 되돌아보며 바른생각으로 바른인식을 유지하고 길러나갈수 있어야 합니다.

틈틈히(특히, 새벽시간) 늙음과 병듦 죽음, 의식주를 수용할때마다 형식이 아닌 본질을 성찰, 그리고 자애관 부정관 붓다눗사띠 무상 무아에 대한 인식을 확립해나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수행자들은 <생각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른 생각, 좋은(법다운) 인식은 통찰과 함께 절로 생겨나기도 하지만 계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승,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도 있지만 인도 스리랑카 태국 등 여러 남방불교 권에서 실제로 그렇게 보고 배웠습니다. 2000년대 중반무렵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한국의 초기불교 수행이 <사띠지상주의>에 경도되어 있다는 인식을 지울수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른 생각으로 일상의 삶을
바르게 성찰하려는 노력, 분명한 앎과함께 사띠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병행될 때
비로소
더욱 분명한 앎이 생겨나고, 바른 견해와 더욱 깊은 성찰이 일어나 마침내 온전한 고의 소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적어보았습니다.
앞에 보내주신 글은 무리없이 잘 정리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애쓰셨습니다.

담마 따라서
고의 온전한 소멸에 이르시길!”



빤냐완따 스님 글을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하다. 직접 수행한 것이 녹아 들어간 글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띠와 삼빠자나에 대한 것이 그렇다.

위빠사나수행에서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한다. 초기경전에서는 항상 페어로 사용된다. 마치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사띠와 삼빠자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스님은 사띠와 삼빠자나에 대하여 용어부터 명쾌하게 정의했다. 사띠를 염(
_이라고 했고, 삼빠자나를 관()이라고 했다. 사띠를 염이라고 한 것은 기억을 의미하고, 삼빠자나를 관이라고 한 것은 분명한 앎을 뜻한다.

빤냐완따 스님은 사띠와 삼빠자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운전자의 비유를 들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하여 사띠라고 한 것이다. 이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두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두는 것으로 비유했다. 기둥은 호흡이고 밧줄은 사띠라고 한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면 그 끈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를 고짜라, 행경이라고 한다. 소가 풀을 뜯는 반경을 말한다. 그것이 몸이 될 수도 있고, 느낌이 될 수도 있고,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법이 될 수도 있다. 이를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사념처라고 한다.

몸관찰 할 때 대상은 주로 호흡이 된다. 호흡은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신념처에서는 호흡을 사띠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에 집중하라고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호흡을 배에서 관찰하라는 말과 같다.

복부관찰은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 사마타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상기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사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그 중에서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생멸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생멸을 관찰하여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이 사띠에 대하여 운전자의 비유로 설명한 것은 탁월하다. 5세기 청정도론의 저자 붓다고사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기둥의 비유의 함께 운전자의 비유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상에서는 항상 운전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상에서 사띠가 유지되기 힘든 것을 말한다. 선원이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일상에서는 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특히 생업에 종사하는 재가불자들은 하루종일 사띠를 유지할 수 없다. 하루종일 한눈 팔지 않고 운전만 할 수 없다. 선원에 살면 할 것이 명상밖에 없기 때문에 사띠가 유지된다. 하루종일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현실의 삶에서는 출재가를 막론하고 기둥에 묶여 있거나 운전대만 잡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성찰이 필요하다.

빤냐완따 스님은 사띠이야기만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선원에서는 가능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사띠와 삼빠자나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사띠만 하는 것이 된다. 삼빠자나가 떼어 지는 것이다. 삶의 경계에 부딪쳤을 때, 예를 들어 탐욕이나 분노가 일어났을 때 사띠할 수 있다. 이때 사띠는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 된다.

전쟁과도 같은 삶의 현장에서도 사띠할 수 있다. 사띠의 제일의 의미는 기억(memory)이다. 수행처에서는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 된다. 그렇게 하면 분명한 앎(삼빠자나,
)이 생겨나서 무상,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언어적 개념이 배제된 실제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경쟁의 현장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현실에서는 사띠-삼빠자나가 아니라 사띠가 될 수밖에 없다. 이때 사띠는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라는 게송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적으로 아는 것이다. 사띠만 있고 삼빠자나는 없는 것이다.

빤냐완따 스님은 생활불교를 강조한다. 그것은 팔정도 실현으로 가능하다고 했다. 특히 성찰과 관련하여 바른 생각과 바른 노력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 모든 바탕은 사띠에 있다. 그런 사띠는 수행용이 있고 일상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선원생활과 생업생활이 다름을 말한다.

선원에서는 사띠-삼빠자나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사띠와 성찰이 중요하다. 전자는 언어적 개념을 타파하여 통찰에 이르고자 함이고, 후자는 언어적 개념에 의지하여 가르침을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항상 사띠를 해야 한다. 사띠의 바탕하에서 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2021-1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