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에게도 깨달음의 기연(機緣)은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0. 28. 10:05

나에게도 깨달음의 기연(機緣)은 있을까?

 


고요한 새벽이다. 아파트가 왕복 8차선 대로변에 위치해 있지만 새벽만큼은 조용하다. 새벽에 차가 적게 다니는 이유도 있지만 아파트 이중창의 역할이 크다고 본다. 어지간한 소음은 차단 된다.

새벽에는 산중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것은 고요때문이다. 주변도 고요하지만 육근도 청정하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아무것도 접한 것이 없을 때 안근청정 이근청정이라 해야 할 것이다.

육근이 청정할 때 행복을 느낀다. 이는 다름아닌 고요함이다. 새벽고요는 행복중의 행복이다. 이는 오온의 생멸이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무상게에서 "에상 뷰빠사모 수코(esaṃ vūpasamo sukho)"라고 했을 것이다. 한자어로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다. 오온의 생멸이 그치는 것에 대하여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라고 한 것이다.

고요함을 사랑한다. 새벽에 맛보는 고요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일상이 시작되면 고요는 깨진다. 제1의 적은 뉴스이다. 특히 선거 때 마음의 평정은 무너진다.

진영으로 갈리어 사활을 건 싸움을 했을 때 이전투구가 된다. 말로 싸우는 것이다. 어떻게 싸우는가? 거짓말, 이간질, 욕설, 꾸며대는 말로 싸운다. 팔정도의 정어를 어기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고요함에 대한 예찬이 많다. 선정에 들면 고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육근이 청정한 상태를 말한다. 또한 세상의 이치를 알아서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이를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번뇌가 일어나면 고요가 깨진다. 그렇다면 번뇌란 무엇일까? 네 가지가 있다.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명의 번뇌를 말한다. 보통 탐, 진, 치, 만, 견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견해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는 왜 생겨날까? 초기경전에서는 '내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나(我)로 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허상만 있을 뿐이다. 이는 깨달음과 관련 있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깨달음의 기연(機緣)이 있다. 종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거나 닭우는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달았다고 말한다.

천장사에 가면 ‘혜월동굴’이 있다. 안내판에 따르면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의 짚신을 삼다가 깨달았다고 한다. 짚신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나무망치로 ‘탁탁’ 두드리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것이다. 선사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오도송을 보면 알 수 있다. 대개 합일에 대한 것이 많다.

초기경전에도 깨달음의 기연에 대한 것이 있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주로 발견된다. 바구 장로의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

“사지를 주무르고,
다시 경행처로 올라가서
안으로 잘 집중하여
경행처에서 경행을 했다.” (Thag.272)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273)

“나의 마음은 그래서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

바구 장로의 깨달음의 기연을 '문지방 깨달음'의 기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율장 대품 주석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바구는 싸끼야족의 출신으로 아누룻다와 낌발라와 함께 출가했다. 어는 날 그는 졸음을 쫓아 내기 위해서 방사를 나섰는데,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1343번 각주) 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구 장로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는 게송에 힌트가 있다. 이는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것이다.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선사의 깨달음과 장로의 깨달음은 다르다. 선사의 깨달음 기연은 개인적 체험에 대한 것이 많지만 장로의 깨달음 기연은 가르침에 대한 것이 많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서 깨달음에 대한 기연의 공통항목이 있다. 이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나에게 일어났다'라는 말과 함께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한 수행을 하다가 어느 날 인연이 되어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됨을 말한다.

깨달음은 좌선 중에서만 일어날까? 아난다 존자의 깨달음에 대한 기연을 보면 그렇지 않다.

깨달음에 대한 기연으로 아난다를 빼 놓을 수 없다. 디가니까야 주석(Smv.10)에 따르면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베개에 닿기 직전에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라 되어 있다.

아난다가 깨닫지 못한 것은 지나친 흥분때문이라고 한다. 아난다는 ‘내일이 모이는 날이다.’라고 생각하여 경행을 하며 밤을 지새워 보냈지만 탁월한 것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쉬어야 겠다.’라며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난다는 깨닫기 위해 밤새 경행을 했다. 그러나 아난다는 지나치게 정진을 했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다. 깨달음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한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달음을 이룬 것이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즉 두 발을 씻고 승원에 들어가 침상에 앉아 ‘쉬어야 겠다.’라고 몸을 침상에 기울이는 순간에 깨달은 것이다.

아난다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에 베개가 닿기 직전에 깨달았다. 이에 대하여 주석서에서는 “집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라 고 했다. 아난다는 네 가지 자세, 즉 행주좌와는 상관 없이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이 가르침에서 누가 눕지 않고 앉지 않고 서지 않고 걷지 않고 거룩한 님이 되었는가?”라고 물으면 “장로 아난다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좌선이나 경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 직제자들의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에 따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이를 게송에서는 깨달은 님의 교법이라고 했다. 오늘날 전승되어 온 빠알리 삼장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청정도론도 그 중의 하나이다.

청정도론이 있다. 남방테라와다 불교의 부동의 준거틀이라고 말한다. 니까야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에는 가르침에 근거하여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청정도론은 칠청정으로 설명된다. 깨달음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의 차제설법과도 맥을 같이 한다. 계청정, 심청정에 이어 혜청정이 있는데 혜청정 첫번째 단계는 견청정이다. 견해가 청정해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을 말한다.

견청정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견을 버리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정견을 갖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이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 가르침을 말한다. 이것이 깨달은 님의 교법일 것이다.

부처님의 교법대로 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첫 시발점은 명색을 아는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이 오온으로 이루어진 것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알게 되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견해가 사라진다. 견해가 청정해지는 것이다.

깨달음의 지혜는 견해가 청정해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자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이 이루어질 수 없다. 설령 누군가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합일이기 쉽다. 이는 나(我)라는 개념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우주의 합일을 말한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을 오온의 작용으로 보면 합일할 것이 없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기 때문이다.

깨달음 기연을 보면 세수할 때 코를 만지다가 몰록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깨닫기가 코만지기 보다 더 쉬운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의문이 어느 날 어떤 계기가 되어 툭 터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선사들의 오도송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처님 직제자들도 깨달음의 기연이 있었다는 것이다.

부처님 직제자들의 깨달음 기연은 특징이 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에 기반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 가르침을 늘 기억하여 실천에 옮겼을 때 어느 날 계기가 되어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첫출발점은 명색을 아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첫번째 지혜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명색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은 첫번째 지혜는 견청정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16단계 지혜가 완성되었을 때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다. 칠청정이 완성된 것이다.

깨달음은 청정으로 완성된다. 가장 먼저 육근이 청정해야 한다. 새벽시간 만큼 좋은 시간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일상이 시작되면 새벽고요는 깨진다. 나에게도 깨달음의 기연은 있을까?

Aniccā vata saṅ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esaṃ vūpasamo sukho

아닛짜 와따 상카라
웁빠다야와야담미노
웃빠짓뜨와 니룻잔띠
에상 뷰빠사모 수코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다.”(S1.11)

 


2021-10-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