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는 매일매일 종(鐘)친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9. 15. 11:47

나는 매일매일 종(鐘)친다

 

 

요즘 자꾸 유튜브만 찾는다. 마음은 늘 유튜브에 가 있다. 윤석열 사건이 점입가경으로 진행됨에 따라 관련된 영상을 추적한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건가?

 

마음을 잡아야 한다. 유튜브만 보고 있을 수 없다.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제공되는 영상을 쫓아 가다 보면 몸도 마음도 피곤해진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유튜브 시청을 중단하고 자리에 앉아야 한다.

 

사무실 불을 껐다. 약간 어두침침하다. 창이 북동향이기 때문에 그렇다. 명상하기에는 좋은 환경이다. 형광등을 켜 놓아서 대낮처럼 밝게 해 놓는 것보다는 자연채광이 더 좋다.

 

 

명상공간에서 행선을 했다. 바로 앉기 보다는 행선을 하다 앉으면 더 효과적이다. 이는 경전에도 있는 말이다. 경전에서는 경행이 목표로 하는 집중을 오래 유지시킨다. (cakamādhigato samādhi ciraṭṭhitiko hoti)”(A5.29)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경행할 때의 집중은 앉아 있는 것보다 어렵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오래 지속되고 몸의 자세를 바꾸어도 그 인상이 사라지지 않는다.”(Mrp.III.236)라는 뜻이다.

 

잠시 행선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평소대로 평좌를 한다. 왼쪽다리를 바깥으로 했다. 오래 앉아 있지 않는다. 길어야 십분 앉아 있는다. 십분 앉아 있어도 효과는 있다, 마음이 진정되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불교TV(BTN) 명상관련 영상을 보았다. 어느 대기업 연구원이 강연했는데 미국 실리콘밸리 연구원들은 명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래 하지 않는다. 고작 1분 한다는 것이다. 과연 1분 명상한다고 효과가 있을까?

 

시간이 돈인 세상이다. 생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일분일초가 아깝다.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떨 때는 초치기 하는 것 같다. 이럴 때 1분은 매우 긴 시간이다. 1분만이라도 눈을 감고 호흡을 지켜본다면 훌륭하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5분 명상이라는 말도 있다. 더도 말고 5분만 앉아 있어도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하물며 10분을 앉아 있다면 많이 앉아 있는 것이다. 특히 생업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다.

 

명상센터에 있다면 한시간은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명상이 잘 되면 두 시간도 좋고 세 시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바삐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는 1분이나, 5, 10분은 긴 시간이다.

 

명상을 하고 나면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마치 흙탕물이 정화된 것 같다. 앉아서 호흡을 단 1분만이라도 지켜본다면 이미 다른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5분이나 10분 지켜본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행선을 한 다음 자리에 앉아서 호흡을 지켜본다. 본래 배의 움직임을 지켜보아야 하지만 초보자는 가슴에 집중이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전면에서 호흡을 보는 것이다. 이는 대념처경에 있는 것처럼 빠리무카사띠에 해당된다.

 

면전에서 호흡을 지켜보았을 때 호흡을 따라 가게 된다. 호흡을 따라 가면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된다. 들숨과 날숨에 따라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잡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호흡을 지켜본다는 것은 마음이 호흡에 가 있는 것을 말한다.

 

호흡을 지켜보며 따라 갈 때 마음이 편하다. 이는 미쳐 날뛰는 마음을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여기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사람이 기둥에 묶는 것과 같이, 새김을 확립하여 대상에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묵어야 한다.”(Vism.8.154)라고 했다.

 

사띠는 밧줄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면 마음이 사방으로 날뛰지 않는다. 늘 알아차림 하라는 이유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늘 사띠하라고 말한다. 일상에서도 사띠가 가능할까? 수행처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루종일 밥만 먹고 수행만 하는 수행처라면 하루종일 사띠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생업도 있지만 삶의 과정에서 이런 일 저린 일이 발생한다. 그럴 때 마다 미쳐 날뛰는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둘 수 없다.

 

일상에서는 어떻게 사띠할 것인가? 그것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 된다. 어떻게 기억하는가? 경전에서 본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떠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마음이 한번 대상으로 향하면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관성의 법칙이 있다.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도 관성의 법칙에 지배받는 것이 된다. 술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술을 마시고, 담배 피는 사람은 계속 담배 피는 것도 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이다. 유튜브시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튜브 시청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알고리즘 하자는 대로 하다 보면 유튜브에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계속 자극적인 영상을 찾다 보면 나중에 허탈하게 된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이럴 때는 과감하게 뿌리쳐야 한다. 어떻게 뿌리쳐야 하는가? 나의 경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앉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앉는 것이 가장 좋다. 5분만 앉아 있어도 효과를 본다. 그 다음으로 좋은 것은 경을 암송하는 것이다. 두가지 모두 마음을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어디에든 가 있기 때문에 착하고 건전한 대상에 마음을 가 있게 하는 것이다.

 

앉아 있기도 힘들고 경을 암송하기도 쉽지 않다. 대단한 결심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번 대상을 잡으면 그 다음 부터는 기쁨과 희열, 평안이 찾아온다. 이를 위딱까와 위짜라로 설명할 수 있다.

 

위딱까는 사유로 번역되고, 위짜라는 숙고로 번역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로 번역했다. 왜 사유를 해야 하고 숙고를 해야 하는가? 이는 마음이 널뛰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을 대상에 묶어 놓아야 한다. 사띠의 밧줄로 꽁꽁 묶어 놓는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놓으면 마음은 나돌아 다니지 못할 것이다. 묶은 끈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를 고짜라라고 하는데 행경으로 번역된다.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은 길이만큼만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이 멀리 달아날 수 없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놓은 것은 위딱까에 해당될 것이다. 그 다음에 호흡을 계속관찰하면 위짜라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종치는 것으로 비유했다.

 

종을 치면 울림이 있다. 여기서 종을 치는 것은 위딱까에 해당되고, 울림은 위짜라에 해당된다. 이를 사유와 숙고, 또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로 설명된다.

 

청정도론에서는 위딱까에 대하여그것은 대상을 향해 마음을 떠오르게 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고, 치고 두드리는 것을 기능으로 삼는다.”(Vism.4.88)라고 했다. 마치 종을 친 다음에 또 계속 치는 것을 위딱까(思惟)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위짜라에 대해서는 종의 울림처럼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것이 숙고이다.”라고 했다. 종을 치면 울림이 있는데 울림을 위짜라(熟考)와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앉아서 호흡을 계속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과 같다. 마치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종을 치면 울림이 있는데, 울림을 보는 것은 숙고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사유와 숙고는 경을 암송하는데 적용할 수 있다.

 

요즘 법구경 찟따왁가를 외우고 있다. 모두 열한 개 게송에서 여섯 개를 외웠다. 그런데 게송 외우기 할 때 첫번째 단어가 중요하다. 첫 단어가 떠올라야 그 다음 연속해서 떠 오르기 때문이다.

 

게송을 외우겠다고 마음을 내서 최초로 떠오르게 하는 것은 마치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이후 연속해서 단어를 떠 올리는데 이는 연속으로 종을 치는 것과 같다.  종을 치면 울림이 있는데, 게송을 외우면 역시 울림이 있다. 다음 단어가 연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한가지를 건들면 고구마 줄기 걷어 올리듯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마치 종의 울림과도 같아서 위짜라와 같은 것으로 본다.

 

마음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마음은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마음은 늘 대상에 머물러 있다. 이와 같은 마음에 대하여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Dhp.33)이라고 했다. 또한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Dhp.34)라고 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법구경에서는 마음은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 앉고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Dhp.35)이라고 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서는 마치 활제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마음을 제어해야 함을 말한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법구경에서는 악마의 영토에 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또 악마의 밧줄에 묶이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성채처럼 확립하여 지혜를 무기로 악마와 싸워라.”(Dhp.39)라고 했다.

 

마음을 제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띠하는 것이다. 행선이나 좌선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상에서는 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게송을 암송하는 것이다. 게송을 암송하는 것 자체가 선법이고 사띠하는 것이 된다. 나는 오늘도 종을 치는 것처럼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게송을 암송할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종()친다.

 

 

2021-09-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