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찰나 사무치도록
요가 매트에 앉는다. 엉덩이에는 자동차 시트용 매트를 받친다. 다리는 평좌를 한다. 보통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하지만 요즘은 반대로 왼쪽다리를 바깥으로 한다.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했을 때 통증이 심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통증 하나 극복하지 못한 초보수행자이다. 아직까지 한시간 앉아 있기도 힘들다. 이런 것을 수행기라 하여 글로 써서 올렸더니 약점이 되었다. 어느 스님은 글을 비난할 때 “한시간도 못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수행기를 올려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든다.
어느 스님은 수행기를 올리지 말라고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스앤에스(SNS)에서 스님들의 이야기를 보면 수행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일상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정치이야기도 있고 심지어 먹방도 있다. 십우도에서처럼 ‘입전수수 (入廛垂手)’의 경지일까?
욕심내지 않고 삼십분만 앉아 있기로 했다. 행선도 삼십분만 하기로 했다. 그대신 자주 하는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한시간 행선하기도 쉽지 않다. 생업에 종사하는 자로서 이것 저것 신경쓰다 보면 하루 24시간 중에서 한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앉아 있으면 온갖 생각이 떠 오른다. 이를 망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에서는 망상도 수행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사마타의 경우 대상에 집중하여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지만 위빠사나에서는 무엇이든지 대상이 된다.
배운대로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부품을 알아차리고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호흡과 연결된다. 코에 집중하지 않는다. 배에 집중하다 보면 가슴에 집중되기도 한다. 호흡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다 보면 몸이 가려울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가려운 대상으로 마음이 가야 한다. 강한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려운 부위를 터치해서는 안된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므로 지켜 보다 보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느낌에 대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수념처(受念處)가 된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사무실 바닥 요가매트에 앉아 있으면 귀의 문을 차단할 수 없다. 기차길이 바로 옆에 있어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거기로 가게 되어 있다. 소리를 알아차림 하는 것은 어떤 염처에 해당될까? 대념처경에 따르면 법념처(法念處)에 해당된다. 이는 “수행승은 여섯 가지 안팎의 감역 가운데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한다.”(D22.22)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위빠사나선원에서 법념처에 대한 설명을 보면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대한 것이라고 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의식을 말한다. 눈을 감은 상태이기 때문에 가장 강한 대상은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기차 지나가는 소리는 어쩔 수 없다. 이 밖에도 수많은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다.
소리가 없는 곳이라면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몸관찰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숲으로 가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숲속 나무아래나 빈집, 동굴로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한 것이다. 수행센터가 사람 소리 나지 않는 곳, 자동차 소리 나지 않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육처는 법념처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육처에는 의식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도 감각의 영역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 감역이 법념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의는 ‘마음의 문(意門)’에 대한 것이다.
눈을 감았어도 소리는 들린다. 한가지 더 허용되는 것은 마음의 문이다. 소리가 없는 숲속이나 동굴일지라도 마음의 문은 닫아 놓을 수 없다. 대상에 집중한다고는 하지만 잡념이나 망상이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 놓을 수 없다. 이는 법구경 인연담에서 ‘뽀띨라장로 이야기(Pothilattheravatthu)’ 에서도 알 수 있다. 삼장법사인 뽀띨라 장로가 칠세아라한에게 한수 배운다는 이야기를 말한다.
칠세아라한은 삼장법사에게 수행지도를 했다. 칠세아라한은 “존자여, 개미굴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굴로 도마뱀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잡으려면 다른 구멍을 막고 여섯 번째 구멍은 놔두고 그 구멍으로 잡아야 합니다.”(DhpA.III.417-421)라고 말했다. 여기서 여섯 번째 구멍은 마음의 문을 말한다.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의(意: mano)에 대한 것이다.
숲이나 동굴, 빈집에서 수행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 다는 말과 같다. 이런 것은 일상에서도 적용된다. 이는 칠세아라한이 “이와 같이 그대도 여섯 감관의 문 가운데 남은 다섯 감관의 문을 닫고 정신의 문에 집중해야 합니다.”(DhpA.III.417-421)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수행한다고 하여 정신의 문마저 막아 놓을 수 없다. 마노의 문, 즉 정신의 문을 열어 놓는 것은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을 알아차림 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마노의 문마저 닫아 놓는다면 ‘멍때리기’가 되거나 ‘잠을 자는 상태’가 될 것이다.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은 열어 놓아야 한다.
매트에 앉아 있다 보면 온갖 것이 들썩이는 것 같다. 눈을 뜨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때는 몰랐던 것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가장 강한 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지만 가려움이 발생되면 가려운 부위로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기차소리가 강하게 들려오면 기차소리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마음의 문으로 분노가 들어오면 분노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이라는 사념처를 모두 하게 된다.
사념처는 오온관찰과도 같다. 우리 몸과 마음을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다섯 가지 다발로 나누었는데,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위빠사나수행이다.
흔히 “찰나에 사무쳐라.”라고 한다. 초기불교에서 하는 말이다. 이는 수행과도 관련이 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말이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찰나를 사무쳐야 한다는 말에 맛지마니까야에서 본 하나의 게송이 떠올랐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M131)
애송하는 게송중의 하나이다. 오늘 좌선하면서 갑자기 이 게송이 떠오른 것은 찰나찰나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는 “그때 그때”라고 되어 있다. 이는 빠알리어 “땃따 땃따(tattha tattha)”를 번역한 것이다. 이 ‘땃따 땃따’라는 말을 ‘찰나찰나’라는 말로 볼 수 있을까?
게송에서는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고 했다. 이 말은 다름아닌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것으로 본다. 왜 그런가? 이 게송에 대한 설명한 가르침을 보면 육처(六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게송과 관련된 경이 네 개 있는데 가장 마지막 번째 경 ‘마하 깟짜야나와 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M133)을 보면 육처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법념처는 마노의 문(意門) 하나만 열어 놓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여섯 가지 감역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청각을 예로 든다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벗들이여, 청각과 소리들 그 양자는 방금 생겨난 것인데, 의식이 그 방금 생겨난 것들에 대한 욕망과 탐욕에 묶이고, 의식이 욕망과 탐욕에 묶이기 때문에 그것에 즐거워합니다. 그것에 즐거워하면, 사람은 현재의 상태에 정복됩니다.”(M133)
마음이 현재상태에 정복되면 어떻게 될까? 매혹적인 형상이나 아름다운 소리에 넋을 잃었을 때 이에 대하여 ‘악마에 의해 정복당했다’고 말한다. 악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그때 알아차려야 한다. 이에 대하여 일어난 현상에 대하여“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tattha tattha vipassati)”라고 했다.
초기경전을 보면 어떨 때는 수행지침서와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맛지마니까야 131번에서 133번 경을 보면 그렇다. 마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써 놓은 것 같다. 이는 “땃따 땃따 위빳사띠”라 하여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게송에서 핵심구절은 “땃따 땃따 위빳사띠”이다. 이 구절은 모든 현상에 대하여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지만 좀더 의역하여 “찰나찰나에 사무쳐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찰나가 중요하다. 찰나지간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손가락을 한번 퉁기는 순간에 수많은 마음이 생멸한다. 과연 찰나지간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찰나를 알아차림 한다는 것은 찰나에 집중한다는 말과 같다. 이는 다름 아닌 찰나삼내를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찰나삼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땃따 땃따 위빳사띠”라는 말이 바로 찰나삼매, 즉 카니까사마디(khaṇika samādhi)를 말하는 것 같다.
카니까사마디에 대한 근거가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삼매에 대한 설명에서 “행복을 잉태하여 성숙시키면 찰나삼매와 근접삼매와 근본삼매의 세 가지 삼매를 완성시킨다.”(Vism.4.99)라고 되어 있다. 찰나삼내, 근접삼매, 본삼매라는 세 가지 삼매가 있음을 말한다. 여기서 찰나삼매는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고, 근접삼매와 본삼매는 사마타에 대한 것이다.
찰나삼매에 대한 것은 초기경전 이곳저곳에서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을 보면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A9.20)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본 각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무상에 대한 지각이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무상과 함께 강력한 통찰이 일어나면, 존재의 나머지 특징을 통찰하여 고귀한 참사람의 지위에 도달하고 마침내 완전한 통찰을 얻어 열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KPTS본 각주)
손가락 튕기는 순간은 매우 짧다. 그 짧은 순간에 무상을 지각하려면 고도로 집중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움직이는 대상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131번과 132번 경에서는 오온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때 그때 관찰하지 못했을 때 현재의 상태에 정복당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느낌을 예로 든다면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M131)라고 했다.
수행초보자이다. 위빠사나수행한다고 앉아 있어 보지만 그다지 진척은 없다. 행선한다고 왔다갔다 해보지만 늘어나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경전의 말씀이 떠오른다. 수행과 관련된 문구가 떠올랐을 때 초기경전은 마치 수행지침서와 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 갑자기 떠오른 것은 맛지마니까야 “땃따 땃따 위빳사띠 (tattha tattha vipassati)”라는 말이다.
“땃따 땃따 위빳사띠”에 대하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바로 거기서 통찰한다.”라고 번역했다. 이를 내 방식대로 번역해 보면 “찰나찰나에 사무쳐라.”라고 말하고 싶다. 찰나찰나 사무치도록 무상(無常)을 보자는 것이다. 무상을 보면 자연스럽게 고(苦)도 보고 무아(無我)도 보게 될 것이다.
2021-08-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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