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면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울었다가 웃는 것처럼 마치 어린 아이 마음같다. 변화무쌍한 마음에 마음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 테라가타에 이런 게송이 있다.
“원숭이여, 멈춰라. 달리지 말라.
예전처럼 그것은 그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지혜로 제어되었으니
여기서 결코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다.”(Thag.126)
발리야 장로가 읊은 게송이다. 장로는 마음을 원숭이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왜 그런가? 마음은 잠시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서유기에 원숭이 손오공이 나온다. 온갖 도술을 부리지만 자기파멸적이다. 천상계까지 휘젓고 다니다가 결국 부처님에게 갇히게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재주는 있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을 때 파멸됨을 말한다.
원숭이처럼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원숭이는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다니면서 끊임없이 눈을 움직인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늘 새로운 대상을 찾을 것이다. 눈과 귀 등 다섯 감각으로 여기 저기 즐길거리를 찾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원숭이와 똑같은 사람이다.
원숭이는 늘 눈을 두리번거린다. 손오공도 그렇다. 손오공이 재주는 있지만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은 내면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내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눈을 감고 앉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손오공에게는 이것이 되지 않는다. 손오공은 단 5분도 가만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원숭이는 단 5분은커녕 단 1분도 앉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단 1초도 앉아 있을 수 없다.
축생은 가만 있지 않는다. 축생은 가만 앉아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다. 축생은 명상을 할 수 없다. 인간만이 명상할 수 있다. 언어가 있는 인간만이 가능하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한다. 초선정 조건을 보면 알 수 있다. 위딱까(思惟)와 위찌라(熟考)가 있어야 선정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본래 불선한 것이다. 내버려 두면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에 지배되기 쉽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질투 등과 같은 불선법을 말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것이 원숭이 마음 같다.
원숭이와 같은 마음을 어떻게 제어해야 할까? 강력한 사띠의 힘 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그 사람을 시기한다면 시기하는 그 마음을 시기하는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명칭 붙인다면 “시기, 시기”하면 될 것이다. 명칭 붙여 알아차리는 순간 시기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이제는 시기의 마음이라고 아는 마음만 남았다. 이 마저도 알아차려야 한다.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시기의 마음이라고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중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시기라고 아는 마음을 내버려 두면 ‘내가 시기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자만이 생기게 된다. 그 ‘내가’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확인한 것을 한번도 확인하는 것이다. 이를 확인사살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확인사살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라는 자만이 발 붙이지 못한다. 그러나 원숭이와 같은 마음은 이렇게 하기 힘들다. 단 5분도 가만 있지 못하고 미쳐 날 뛰는 마음이 마치 원숭이와도 같다.
2021-08-27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찰나찰나 사무치도록 (0) | 2021.08.31 |
---|---|
내가 잠 못이루는 것은 (0) | 2021.08.31 |
윤회에 출구가 있다 (0) | 2021.08.22 |
허리아픈 환자처럼 (0) | 2021.08.17 |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0) | 2021.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