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에 출구가 있다
가르침의 바다는 넓고도 깊다. 넓고도 깊은 가르침의 바다에서 노닐다 보면 때로 진주와 같은 가르침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다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회의론자 사리뿟따를 부처님의 진리에 세계로 이끌게 한 법문일 것이다.
율장대품 ‘크나큰 다발(大犍度)’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 당시 회의론자 산자야 벨라뿟따는 이백오십명의 큰 유행자 무리와 함께 있었다. 그때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도 그 무리에서 청정한 삶을 닦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약속했다. “먼저 불사의 진리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자에게 알려 주자.”(Vin.I.39)라고.
뱀장어를 잡듯 혼란스러운 이론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 육사외도 스승이 있었다. 산자야 벨라뿟따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 산자야의 회의론은 모든 사상을 아우르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회의론자들은 이른바 사구분별(四句分別)이라 하여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산자야 벨라뿟따의 사구분별론은 어떠한 형이상학에 대하여 어떠한 판단도 내리기를 거부했다. 이를 회의론이라고 하는데, 이는 회의론을 뜻하는 아마라빅케빠바다(amarāvikkhepavada)라는 말이 마치 “뱀장어를 잡는 듯이 혼란스러운 이론”을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디가나카의 경’(M74)을 보면 부처님이 회의론자 디가나카와의 대론 장면이 있다. 디가나카는 긴 손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회의론자 디가나카는 부처님을 만나자 마자 대뜸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M74.2)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회의론자의 태도를 말한다. 이와 같은 회의론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싼다까의 경’에서는 “이리저리 질문을 받으면, 뱀장어를 잡듯이 혼란스러운 이론에 빠집니다.”(M76.26)라고 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사리뿟따와 목갈라는 회의론자였다. 회의론을 능가할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회의론자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이들에게 회의론을 능가하는 이론이 등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즘 말로 갈아탈 것이다.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이 세상에 불교보다 더 훌륭한 종교가 있다면 그 쪽으로 가겠다.”라고.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심정도 그랬을 것이다. 당대 최고 이론이고 가장 인기 있는 이론이었던 회의론 보다 더 나은 이론이 있으면 갈아타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불사의 진리에 도달하는 자가 다른 자에게 알려 주자.”(Vin.I.39)라고 말했다고 본다.
앗사지 경행에 매료된 사리뿟따
마침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 갈아탈 기회가 찾아왔다. 사리뿟따가 탁발 중에 경행하던 앗사지를 발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장대품에서는 “그때 앗사지 존자가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라자가하 시로 탁발하러 가는데, 나아가고 물러서거나 바라보거나 돌아보거나 굽히거나 편거나 단정하게 눈은 아래로 향하고 위의를 갖추고 들어갔다.”(Vin.I.39)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앗자지의 경행은 위의가 있었던 것이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경행에 매료되었다. 아마 아직까지 자신의 교단에서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앗사지는 매순간 알아차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몸관찰이라고 볼 수 있다. 대념처경 몸관찰에 따르면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D22.6)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리뿟따는 앗사지를 아라한으로 보았던 것 같다. 경행하고 있는 위의에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감관은 청결하고 피부색은 깨끗합니다. 그대는 누구에 의지하여 출가했고, 그대의 스승은 누구이고,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합니까?” (Vin.I.39)라며 물어보았다.
앗사지는 사리뿟따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그러자 사리뿟따는 더욱 더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 이번에는 배운 것 중에 하나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에 앗사지는 난감했던 것 같다. 앗사지는 “나는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입니다.”라고 말했다. 앗사지는 새내기 신참수행승이었던 것이다.
사리뿟따는 점점 앗사지에게 흥미를 가졌다. 설령 그가 신참이라고 하더라도 위의를 보아서는 심오한 가르침을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들은 것 하나만이라도 알려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앗사지는 사리뿟따의 요청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알려 주었다.
“사실들은 원인으로 생겨나며
그 원인을 여래는 설합니다.
그것들이 소멸하는 것 또한
위대한 수행자께서 그대로 설합니다.”(Vin.I.40)
사리뿟따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최고 수행자였다. 그래서일까 앗사지가 전하는 짧은 말의 의미를 파악했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그때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유행자 사리뿟따에게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Vin.I.39)라고 했다.
사리뿟따에게 진리의 눈(Dhamma cakkhu)이 생겨났다. 이는 사리뿟따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생멸의 원리에 대한 눈이 열렸음을 말한다. 사리뿟따는 앗사지의 짤막한 말 한마디를 듣고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감격하여 앗사지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했다.
“만약 오로지 이것만이라도 하여도
오히려 올바른 가르침이니,
그대들은 이미 근심 없는 진리를 꿰뚫었으니,
지난 수천억 우주기 중에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Vin.I.40)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사리뿟따에게는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는 사구분별도 필요 없게 되었다. 또한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라 하여, 질문을 받으면 이리저리 회피하는 혼란스러운 뱀장어와 같은 이론도 필요 없어졌다. 앗사지가 전한 짤막한 가르침은 분명했다.
사리뿟따는 친구 목갈라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불사의 진리를 발견하면 서로 공유하자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회의론의 스승은 산자야 벨라뿟따에게서 떠났다. 회의론 보다 더 수승한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정한 삶을 실현하여 불사에 이를 수 있는 가르침을 발견한 이상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손절’한 것이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도
어제 상윳따니까야를 뒤적이다가 한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깔라라캇띠야의 경’(S12.32)을 말한다. 이전에도 보았던 경이다. 노랑 형광메모리펜으로 칠해져 있어서 경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언젠가 글로서 표현하고자 했던 경이다. 이는 사리뿟따가 앗사지로부터 들은 짤막한 게송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기 때문이다.
진흙속에서 진주 찾기는 어렵다. 수천, 수만의 경에서 가슴 설레는 경을 발견하면 넓고 깊은 가르침의 바다에서 보물을 발견한 것 같다. 깔라라캇띠야의 경도 그렇다. 글로서 표현하지 않으면 배겨 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사리뿟따가 앗사지에게 전해 들은 게송은 심오한 의미가 있다. 깔라라캇띠야의 경에 있는 게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벗이여, 태어남의 바탕이 되는 그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고 안다면,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고 앎으로써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S12.32)
이 구절을 보면 연기의 법칙과 아라한선언이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그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 (tassa nidānassa khayā khīṇasmiṃ khīṇāmhīti viditaṃ. Khīṇāmhīti viditvā)”(S12.32)라는 말이 핵심이다. 사리뿟따가 앗사지에게 들은 말과 똑같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도 소멸된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 인용된 구절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주석에서는 “어떤 조건으로 있는 태어남은 그 조건이 소멸되면 소멸된 태어남의 조건에 따라 태어남에 의해 형성된 결과도 소멸한다.”(Srp.II.62)라고 되어 있다.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이는 연기의 순환적 연기에 대한 것이다. 환멸적 연기를 보면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라고 표현된다.
태어남의 조건은 무엇일까? 십이연기 정형구를 보면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라고 되어 있다. 존재가 태어남의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존재가 없다면 태어남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환멸연기에서는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라고 표현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했다. 이를 연기의 순환고리로 설명한 것이다. 또한 연기의 환멸로도 설명한 것이다. 깔라라캇띠야의 경에서 언급된 연기의 법칙은 연기의 환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번역이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에서는 “그 원인이 다하기 때문에 다함에 대하여 다함이라고 압니다.”라고 번역했다.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골로 간다
깔라라캇띠야의 경에서는 환멸연기에 대하여 태어남, 존재, 집착, 갈애 순으로 환멸적 연기를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환멸적 십이연기 모두를 다 설명한 것이 아니다. 느낌 단계에서 멈춘다. 그래서 부처님은 “느낌 가운데 환락이 더 이상 그대에게 일어나지 않는가?”라며 사리뿟따에게 어떻게 답할 것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 질문에 이와 같이 ‘벗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 벗이여, 이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고 알려질 때 느낌 가운데 환락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S12.32)
위빠사나 수행에서 느낌은 매우 중요하다. 느낌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 간다는 것은 연기가 순환됨을 의미한다. 연기가 회전됨에 따라 윤회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윤회하는 삶을 살 것인가 윤회를 끊을 삶을 살 것인가? 이에 대한 갈림길은 느낌에 달려 있다. 세 가지 느낌이 있다. 즐거운 느낌(樂受), 괴로운 느낌(苦受),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넘어가서 연기가 회전된다.
갈애는 집착으로, 집착은 존재로, 존재는 태어남으로 전개된다. 그 끝은 어디일까? 절망이다. 이는 십이연기 정형구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속된말로 표현하면 ‘골로 간다’라고 말할 수 있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여 '갈애의 강(taṇhānadī)'을 건넜을 때, 이는 케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과 같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 것과 같다. 갈애의 강을 건넜을 때 집착, 존재, 태어남, 절망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골로 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윤회에 출구가 있다
존재를 윤회하게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무명과 갈애를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상윳따니까야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S15.1)라고 했다.
존재가 윤회하는 원인 두 가지는 무명과 갈애이다. 그런데 무명은 덮인 것이고, 갈애는 속박이라고 했다. 모르기 때문에 윤회하고, 갈애에 묶여 있기 때문에 윤회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누구나 이런 의문을 한다. 그러나 속시원히 알 수 없다. 나의 머리로는 한계가 있다. 이 책 저 책을 보지만 명쾌하지 않다. 이런 말 저런 말 들어 보지만 머리만 혼란스럽다. 이럴 때는 초기경전을 보아야 한다.
니까야를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상윳따니까야 인연의 모음(S12)을 보면 내가 왜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이는 십이연기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십이연기 가르침은 심오하다. 아난다는 연기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자 “저에는 명백히 드러납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를 나무라며 “이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는 깊고, 심오하게 출현한다.”(D15.2)라고 했다.
연기법은 심오하다. 어느 정도로 심오할까? 이는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꿰뚫지 못하면, 이와 같은 이 뭇삶들은 실타래에 묶인 것과 같이, 마름병에 덮인 것과 같이, 문자 풀에 엉킨 것같이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지옥의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D15.2)라고 말씀하신 부처님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있게 된 것은 무명때문이다. 몰라서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알면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사성제를 알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윤회의 탈출구는 무엇일까? 이는 삼세양중인과도표를 보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삼세양중인과도표를 처음 본 것은 2009년 한국위빠사나선원에서이다. 현재 한국명상원 이전 이름을 말한다. 그때 당시 묘원선생이 위빠사나 수행 지도를 했는데 강단에는 커다란 삼세양중인과도표가 있었다.
삼세양중인과도표를 보면 십이연기 구조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심오한 십이연기가 도표로 표현된 것이다. 이는 미얀마 모곡사야도가 사용한 것이다. 미얀마 양곤 모곡수행센터를 방문하면 삼세양중인과도표는 첨탑에서도 볼 수 있고 벽면에서도 볼 수 있다.
삼세양중인과도표를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다. 느낌(受)에서 갈애로 넘어가기 전에 출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느낌에서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갈애의 강을 건너가지 않으면 윤회를 벗어나는 출구로 보는 것이다.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성제이다. 사성제를 알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이를 수행적 측면에서 본다면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느낌에서 알아차리면 갈애로 진행되지 않는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여 갈애의 강을 건너게 된다면 속된말로 ‘골로’ 가게 되는 것이다.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
느낌 단계에서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이는 깔라라캇띠야의 경에서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S12.32)이라고 아는 것이라고 했다. 즐거운 느낌도 괴롭고, 괴로운 느낌도 괴롭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괴로운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엇이든 느껴진 것은 괴로움에 속한다.”(S12.32)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즐거운 것을 즐겁다고 알고, 괴로운 것은 괴롭다고 안다. 그러나 부처님은 즐거운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모두 괴롭다고 알라고 했다. 왜 그런가? 이는 무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가지 느낌은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S12.32)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알았을 때 느낌에 대하여 갈애하지 않을 것이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갈애의 강을 건너지 않는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에서 출구가 있다. 무명은 태어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살아 있는 이 순간에 알아차림만 유지한다며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윤회에 탈출구가 있다. 그래서 사리뿟따가 앗사지에게 들은 “그 원인의 소멸에 의해서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S12.32)의 최종단계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2021-08-2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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