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집에 있으면 자세가 나온다. 지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를 말한다. 이런 자세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집을 나와야 한다. 갈 데가 있어서 다행이다. 대체휴일임에도 평시와 다름없이 일터에 나왔다.
일은 없다. 일감이 없어도 나오고 일감이 있으면 당연히 나온다. 할 일이 없어도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일이 된다. 어느 것이든지 일 아닌 것이 없다. 오늘 해야 할 일, 즉 글을 하나 완성하고 요가매트에 앉았다.
앉아 있어 보지만 오래 가지 않는다. 내심 한시간을 기대하지만 30분도 힘들다. 잘해야 일이십분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효과는 있다. 모든 감각기관을 차단하고 마노(意識)의 문만 열어 놓았을 때 고귀한 자가 된 것 같다.
앉아 있으면 별 생각이 치고 들어온다. 그 중에 하나가 이틀 전에 유튜브에서 본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것이다. 신센구미(新選組)에 대한 것으로 강렬한 인물 묘사가 특징이다. 어느 정도인가? 삶을 지배할 정도이다.
화가가 호랑이를 그려 놓고 호랑이를 두려워한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화가가 귀신 그림을 그려 놓고 귀신에 지배당한다는 말이 있다. 유튜브에서 본 ‘龍が如く’도 그랬다. 강렬한 신센구미의 멤버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된 얼굴을 오래 보면 각인된다. 이는 실물 영상을 보는 것과 다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특정부위를 강조하여 묘사하기 때문에 더욱더 강렬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틀가량 이미지 잔상 때문에 힘들었다. 이런 것이 어쩌면 니밋따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요즘 송기원 선생의 소설 ‘숨’을 읽고 있다. 한번에 다 읽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밤 사이에 다 읽을 수 있지만 하루에 몇 페이지 밖에 읽지 않는다. 그것도 줄 치며 읽는다. 중요한 부위는 별표시도 해놓고 형광메모리로 칠해 놓기도 한다.
소설 숨에서는 선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니밋따(nimitta)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흡에 집중했을 때 빛이 생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네 가지 선정 단계로 설명했다.
한번 표상(nimitta)가 생겨나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이는 빛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백열지옥’이라고 했다. 빛을 보면 황홀한 것임에도 지옥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좌선을 해 본다. 내심 니밋따를 기대한다. 나에게도 빛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다. 불과 일시십분만에 빛을 볼 수 없다. 적어도 한달 이상 앉아 있어야 본다고 한다. 그것도 인연이 있어야 본다고 말한다.
니밋따가 일어나려면 전생에서 무탐, 무진, 무치 수행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원인을 조건으로 해서 태어났을 경우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니밋따는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며칠전 유튜브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렬한 얼굴 인상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다. 혹시 니밋따도 이런 것이 아닌 것인지 의문해 보았다.
호랑이 그림을 하루 종일 보고 있을 때 눈을 감아도 호랑이가 보일 것이다. 좀더 집중이 되면 나중에 호랑이가 살아 움직일지 모른다. 정지화상이 동영상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귀신그림을 하루 종일 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좌선 중에 강렬한 이미지를 보았다면 꽤 오래 갈 것 같다. 그 이미지에 압도되어 버릴 것이다. 그 결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이 좋은 이미지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의 이미지라면 어떻게 될까? 악마의 이미지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버릴지 모른다.
빛에 대한 욕심이 있다. 빛을 보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수행처에서 하루종일 몇 달 앉아 있으면 볼지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빛을 보아서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빛이 좋다고 하여 하루종일 앉아 있을 수 없다. 빛의 황홀함에 빠져 앉아만 있다면 바른 길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청정도론 ‘길과 길 아님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편을 보면 열 가지 경계를 말하고 있다. 이는를‘통찰의 경계적 오염’이라 하는데 빛, 앎, 희열, 안온, 행복, 확신, 분발, 확립, 평정, 욕구를 말한다.
미얀마 파옥명상센터에서는 니밋따를 강조한다. 니밋따가 떠야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 말씀하신 네 가지 선정단계를 성취해야 진정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니밋따가 뜨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수행인연이 있어야 가능함을 말한다. 그래서 우 자나카 사야도는 위빠사나 수행하는 것에 대하여 니밋따 없이도 통찰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했다.
니밋따가 떠서 네 가지 선정 단계에 진입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 전생부터 무탐, 무진, 무치 수행을 하여 지혜를 갖춘 수행자가 아니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빠사나를 하면 선정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도 통찰수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만으로도 통찰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하여 ‘선정이 없는 건조한 통찰자[乾觀者: sukkhavipassati]’라고 한다. 반면 니밋따를 보아서 선정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함께 하여 해탈한 자에 대하여 ‘양면해탈자’라고 한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위빠사나와 같은 통찰수행을 필요로 한다.
소설 숨에서는 니밋따를 본 것에 대하여 백열지옥으로 묘사했다. 앉으면 니밋따가 뜨는 것이 한편으로 좋기는 하지만 또한편으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 됨을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떤 표상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애니메이션에서 등장인물의 강렬한 캐릭터 잔상이 남아서 일상을 지배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를 ‘도비도청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칠청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계, 정, 혜 삼학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계청정, 마음청정, 견청정, 의심극복청정, 도와 도아님의 청정, 도 닦음의 청정, 지견청정을 말한다. 이 중에서 빛과 같은 니밋따는 다섯 번째 ‘도와 도아님의 청정(maggamāggañādassana visuddhi: 道非道淸淨)’에 해당된다.
청정도론에서는 도비도청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수행중에 니밋따, 즉 빛을 보았을 때 “나는 길에 도달했고 경지를 획득한 것이다.”라고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지 빛을 본 것에 지나지 않음에도 마치 도와 과의 경지를 이룬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빛을 탐하는 자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근본적 명상주제를 포기하고 빛만의 유혹에 빠져 앉아 있는 것이다.”(Vism.20.107)라고 했다.
빛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청정도론에서는 “나에게 이러한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 유위적인 것이고,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파괴되기 마련이고, 괴멸되기 마련이고, 사라지기 마련이고, 소멸되기 마련이다.”(Vism.20.126)라고 지혜로서 판별하고 고찰하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니밋따에 대하여 ‘유위적 조작’이라고 했다. 이는 니밋따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까시나가 좋은 예이다. 하나의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바라보았을 때 눈을 감아도 표상이 떠오른다. 닮은 표상이다. 그런데 표상은 마음에서 더욱 더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정은 인위적 조작에 해당된다. 마치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즐기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유위적 조작은 망상도 이에 해당된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마두삔디까경’에서 빠빤짜(妄想 또는 戱論)가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해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 (M1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망상이 생겨나는 과정에 대한 것은 맛지마니까야 1번경인 ‘근본법문의 경’에서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은 “그는 땅을 땅으로 여기고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 가운데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며 ‘땅은 내 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에 대해 즐거워한다.”라고 했다. 이는 생각이 망상(maññati) 으로 전개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언어적 개념이 들어 가면 무엇이든지 망상이 될 수 있다. 창조주, 하느님(brahma) 등 온갖 망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니밋따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말 마음이 물질을 만들 수 있을까?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는 선정삼매에서 가능한 것이다. 선정에서 보는 빛도 일종의 물질이다. 이는 마음이 만든 물질이다. 그런데 물질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칸다상윳따(S22)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물질에 대하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라고 했다. 왜 물질이 무상한 것인가? 이는 “물질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에 의해 생겨나는 물질이 어찌 무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S22.18)도 알 수 있다.
업에서 생겨나는 물질이든, 마음에서 생겨나는 물질이든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무상한 것을 붙들고 있다면 집착이다. 빛이 좋다고 빛에 집착하여 빛만 바라보고 있다면 이는 마음이 만들어 놓은 물질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청소년이 영화배우가 좋다고 하여 영화배우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삼매를 닦으라고 했다. 부처님이 삼매를 닦으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빛과 같은 니밋따를 즐기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 삼매를 닦으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수행승들이여,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가?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지각의 발생과 소멸, 형성의 발생과 소멸, 의식의 발생과 소멸을 분명히 안다.”(S22.5)
부처님은 삼매에 들라고 했다. 삼매에 들어서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보라고 했다. 이는 카니까사마디를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순간삼매 또는 찰나삼매라고 한다. 삼매에 들어서 빛과 같은 니밋따를 즐기라는 말은 아니다.
니밋따는 형성된 것이다. 언젠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그런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라지고 말 실체도 없는 것에 넋 잃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런 니밋따는 반드시 빛 만을 말하지 않는다. 호랑이 형상도 될 수 있고 귀신 형상도 될 수 있다. 전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귀신은 있을까? 이런 의문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언젠가 어느 스님은 불교방송(BBS)에서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있을 것이고, 귀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마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지 않다.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부처님은 ‘회의론’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회의론자가 아니다. 무엇이든지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이는 오온을 분석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귀신은 없다. 이는 육도 윤회에서 아귀나 야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책이나 TV, 영화 등을 보고서 말하는 귀신을 말한다. 이런 귀신은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자신의 마음에나 있을 것이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 따르면 마음은 물질을 만들어낸다. 좌선 수행중에 보는 니밋따가 이에 해당된다. 빛을 보았다면 이는 물질에 해당된다. 이 물질은 어디서 왔는가? 마음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니밋따는 빛 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호랑이 그림일 수도 있고 귀신 그림을 수도 있다.
하루 종일 귀신 영화만 보면 어떻게 될까? 눈을 감아도 귀신 형상이 보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귀신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임에 틀림없다. 마음도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온은 생멸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다. 마음으로 만들어 놓은 물질도 생멸하는 것으로 실체가 없다. 그럼에도 마음에 이미지를 붙들어 매고 있다면 거기에 매이는 것이다. 빛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늘 좌선을 조금 해 보았다. 내심 빛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빛을 보는 순간 빛에 끄달릴 것이다. 빛이 집착이 되어 빛을 즐기고자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도가 아닌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비도(非道)라는 것이다.
비도는 버려져야 한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파악해야 한다. 좌선을 통해서, 경행을 통해서, 일상에서 정신과 물질의 생멸을 아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는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신기루, 파초 등처럼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4)라고 아는 것이다.
2021-08-16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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