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 16:40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근사해 보일 것 같았다. 페이스북에서는 너도 나도 시인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들끼리 호칭할 때 시인이라는 명칭을 붙여 준다.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나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블로그에 시를 썼다.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하다 보면 무수한 게송을 만나게 되는데 사구게로 이루어진 시는 이미 익숙한 상태였다.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는 주로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윳따니까야 1권도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윳따니까야는 모두 7권으로 주제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상윳따니까야 1권에 대해서는 사가타왁가상윳따(sagātha vagga sayutta)라고 한다. 이는 시와함께 모아 엮음이라고 한다. (sa)가 함께의 뜻이고, 가타(gātha)는 게송의 뜻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되어 보고자 블로그에 짤막한 글을 수백개 썼다. 경전의 게송을 보고서 흉내내 본 것이다.

 

어느 해인가 안양아트센터에서 서화전이 열렸다. 안양지역 문인들의 전시회를 말한다. 관계자에게 시인이 되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시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진입장벽을 느꼈다. 시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수행자가 되기로 했다.

 

수행의 진척이 없을 때

 

스스로 재가수행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불러도 되는 것일까? 제대로 수행도 하지 않은 자가 스스로 수행자라고 했을 때 가소롭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귀엽게 보아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의 진척이 없을 때 수행자라고 부르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작은 일인사무실 중앙에 칸막이를 하고 카페트를 깔아 놓은 것이다. 집에 있던 요가매트도 가져다 놓았다. 틈만 나면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한다. 그러나 한시간 채우는 일은 없다. 고작 일이십분이 고작이다. 이렇게 해 가지고서는 아무것도 안된다. 최소한 30분 이상 앉아 있어야 하고, 최소한 30분 이상 행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수행이 안되는 것일까? 그동안 선물로 받아만 놓은 책을 꺼내 보았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이사장 빤냐완따 스님에게 받은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부제로 붓다의 마음수행법이라고 되어 있다. 정식으로 출간된 책이 아니다. 출판사 이름도 없다. 다만 연꽃필 무렵이라는 명칭이 있다. 아마 문구점에다 인쇄와 제본을 의뢰하여 만든 것 같다.

 

 

책은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이다. 추천사를 보니 한국테라와다불교 상가라자 뿐냐산도(도성)스님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에서 공식으로 인정된 책임을 알 수 있다. 책을 서문을 보니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엮은이 합장으로 되어 있다.

 

빤냐완따 스님이 자신을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한산성이 바라 보이는 천림산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년 7월 비가 엄청나게 올 때 점심공양 올린 바 있다. 스님은 성남시 비행장 가까운 곳 천림산 기슭 콘테이너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

 

수행의 진척이 없다. 홀로 수행하려 하니 스승도 없고 지도하는 사람도 없어서 책에 의지한다. 이럴 때 수행지침서가 많은 도움이 된다.

 

요즘 빤냐완따 스님의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읽고 있다. 마치 위빠사나수행 교과서를 읽는 것 같다. 그 동안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것도 실참수행위주이다. 아마도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편집했기 때문에 더 다가오는지 모른다. 이는 스님이 서문에서 이 책은 마하시 사야도와 그분 제자들의 가르침을 필자가 미얀마와 인도 등지에서 실제로 배우고 이해한 범위 내에서 정리한 것이다.”라고 쓴 것에서 알 수 있다.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책에서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이라는 말에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행선에서 6단계 동장을 말한다. 발을 들어서 나아가고 놓음을 여섯 단계 동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이라는 말은 오래 전에 알고 있었다. 2016년 미붓아카데미에서 도이법사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때 당시 미디어붓다 이학종 대표기자가 불자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미얀마에서 수행한 바 있는 노법사는 행선을 지도할 때 명칭을 붙이라고 했다. 초보자에게 명칭을 붙이는 것은 미얀마 마하시전통에서 장려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수행이 초보라서 의미를 잘 몰랐다. 3개월가량 짧은 수행으로 맛만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 책을 보면서 다시한번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을 새기게 되었다. 발을 떼려고 할 때 듬듬듬하고, 발을 나아갈 때 감감감하고, 발을 내려 놓을 때놓음놓음놓음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 단계와 세 번에 걸쳐서 하기 때문에 육단계 행선수행이 된다.

 

발을 떼려고 할 때 먼저 뒷금치가 들린다. 이때 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앞금치를 뗄 떼 역시 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 때 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듬듬듬하며 동작을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행선할 때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하며 명칭을 붙이니 집중이 잘 된다. 그러나 잠시 하고 말면 효과가 없다. 지침서에서는 최소한 30분 이상 하라고 했다.

 

행선을 30분이상 하기가 쉽지 않다. 좌선을 30분 이상 하는 것 보다 행선을 30분 이상 하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똑 같은 행위를 30분 이상 반복한다는 것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마하시전통에서는 무려 1시간 행선하라고 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을 번갈아 가며 하라고 했다. 실제로 미얀마 마하시시계통 수행센터에서는 짝수 시간에는 좌선을 하고 홀수 시간에는 행선을 하는 것으로 시간표가 짜여져 있다.

 

좌선보다 행선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좌선보다 행선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특히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그렇다. 움직임을 관찰하면 좌선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음을 말한다.

 

행선과 관련하여 두 권의 수행지침서를 열어 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위빳사나 수행 28마음의 지도를 말한다. 전자는 우 자나카 사야도 법문집이고 후자는 우 조티까 사야도의 법문집이다. 모두 실참수행에 대한 것이다.

 

우 자나카 사야도는 견해청정(diṭṭhivisuddhi)에 대하여 행선 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견해청정은 칠정정에서 첫번째 청정을 말한다. 행선을 하여 어떻게 견해청정에 이를 수 있을까?

 

 ‘내가 있다는 견해를 유신견(有身見)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나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행선을 해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면 내가 있다는 견해를 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히여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집중이 지속적으로 5, 10분이나 20분 정도 이어져 어느 정도 깊은 집중을 얻으면 꿰뚫어 보는 지혜가 분명하고 예리하게 되어 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때로는 육체적 형태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린 채로, 단지 잘게 끊어지는 움직임만을 매우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또한 움직임의 과정과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의 과정도 구별합니다.”(위빳사나 수행 28, 188)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육체적 형태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발의 움짐임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마음만 있을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그때 사람, 존재라는 잘못된 개념이 제거되어 지므로 여러분의 견해는 청정해집니다.”라고 했다.

 

행선을 해서 견해청정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이는 단지 발의 움직임만을 관찰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단지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다고 아는 것에 대하여 나마루빠 빠릿체다 냐나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라고 하여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제1단계에 해당된다. 또 칠정정 중에서도 첫번째 청정인 견해청정에 해당된다.

 

나마루빠(名色)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는 들어가야 할 것이다. 나는 과연 이 단계에 들어가 있을까? 아직까지 좌선이나 행선에서 집중이 이루어져 있기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위빠사나 지혜에는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조차도 들어가지 못했을 때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까? 1단계 지혜와 견해청정에 대해서 더 알아보아야 한다. 수행지침서를 열어 보는 것만큼 도움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는 우 조티카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열어 보았다.

 

 

우 조티까 사야도의 마음의 지도는 이 시대 최고의 수행지침서라고 볼 수 있다. 청정도론에 근거하여 칠청정과 위빠사나 16단계 지혜를 잘 설명해 놓았다. 그것도 자신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마음의 지도는 읽어도 읽어도 새롭게 느껴진다. 이는 아직 체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것은 견해청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위빠사나 첫번째 지혜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우 조티카 사야도는 먼저 청정도론에 있는 나마루빠낭 야타닷사낭 딧티비숫디 나마(nāmarūpa yathādassana diṭṭhivisuddhi nāma)”(Vism587)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는 견해의 청정이라는 것은 명색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Vism.18.2)라고 해석된다. 여기서 명색은 정신과 물질을 말한다. 이름과 형태가 아니다.

 

나마루빠가 이름과 형태가 아니라 왜 정신과 물질인가? 나마루빠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로 본다면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중표 교수는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보아서 초기경전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부처님 이래 새로운 해석이라고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았다.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보는 것은 우파니샤드 방식 해석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방식의 해석을 적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념만 타파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중론에 의한 경전해석방식을 말한다.

 

이중표 교수식의 해석방법을 적용하면 수행을 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개념만 타파하면 그만이다. 이런 염려가 있어서일까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분명하게 나마루빠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나마루빠에 대한 정의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도 확인된다. 부처님은 명색이란 무엇인가? 그것에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S12.2)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마루빠가 정신-물질인 것은 분명하다. 나마루빠를 정신-물질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정신과 물질의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나마루빠를 이름-형태로 본다면 개념이기 때문에 성품을 볼 수 없다.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성품을 볼 수 있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은 실재하는 것이다. 이 몸과 마음에서 실재하는 성품을 보아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실재하는 성품을 보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우 조티카 사여도는 나마루빠낭 야타닷사낭 딧티비숫디 나마에 대하여견해의 청정은 나마를 정신과 현상의 과정으로, 루빠를 물질 현상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131)라고 설명했다.

 

어떻게 해야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실재하는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우 조티카 사야도는 소리를 예로 들었다. 소리라는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해서이다.

 

나무 망치로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 이때 소리는 나무망치에서 나는 것도 아니고 종에서 나는 것도 아니다. 나무망치로 쳤기 때문에 소리가 나는 것이다. 나무망치를 세게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약하게 치면 작은 소리가 날 것이다.

 

소리라는 법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것이다. 만약 소리가 항상 있는 것이라면 세게 칠 때나 약하게 칠 때나 같은 소리일 것이다. 소리를 단지 개념으로 생각하면 소리는 항상 있는 것이 되고 소리의 크기도 항상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없다. 조건에 따라 발생되는 소리만 있을 뿐이다. 이것이 소리의 성품이다.

 

소리는 귀로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소리가 발생했을 때 아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청각기관은 물질이고 소리인 것을 아는 것은 정신이다. 귀가 없다면 소리가 있어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귀가 있어도 아는 마음이 없다면 소리가 있는 줄 모를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말한다.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견성체험해 준다고 하여 책상을 탕탕치거나 손뼉을 치거나 종을 친다. 그러면서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 뿐이라까요.”라고 말한다. 교학과 교리가 뒷받침되지 않았을 때 이것타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마루빠에 대하여 안다면 이것타령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이 단지 정신-물질 과정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이것타령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소리를 듣거나 보고나 맛보거나 할 때 정신-물질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왜 그런가? 정신과 물질은 서로 조건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행선으로 설명할 수 있다.

 

행선할 때 왼발, 오른발 하며 발을 옮긴다. 이때 발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의도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죽은 자와 같다. 생명현상이 없는 몸은 나무토막과도 같은 것이다.

 

발의 움직임은 의도에 따라 일어난다. 행선 6단계를 하면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때 의도는 정신적 현상이다. 발을 움직일 때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나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개념은 오로지 생각속에서만 있는 것으로 실체도 없고 실재하지도 않는다. 개념이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우 조티카 사야도는 따라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지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첫번째 통찰입니다.”(136)라고 했다.

 

수행자가 첫번째 통찰에 이르지 못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통찰수행이라고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법은 우리 몸과 마음에서 보는 것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법이다. 이를 빠라맛타담마라고 한다. 한자어로 궁극적 실재라고 한다.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이다. 모두 조건발생하는 것들이다.

 

조건발생하는 법은 무상한 것이다. 그리고 괴로운 것이다.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빠라맛타담마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조건에 따라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번 새롭다.

 

어쩌면 우리는 매순간 새로 태어나는지 모른다. 있다면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 현재는 잡을 수 없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찰나생찰나멸한다.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위빠사나수행은 16단계로 되어 있다. 가장 첫번째 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정신과 물질이 섞이지 않음을 말한다. 물질인 몸과 정신인 마음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정신과 물질이 서로 조건지어져 상호작용하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자아이니 영혼이니 중생이니 하는 말들은 발을 붙이지 못한다. 모두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이렇게 우리 몸과 마음이 정신-물질의 상호작용인 것을 아는 것에 대하여 첫번째 통찰이라고 한다.

 

스스로 위빠사나 수행자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정말 위빠사나 수행자일까? 아직까지 정신과 물질을 통찰하지 못했다. 이는 좌선과 행선을 통해서 이 몸과 마음이 정신-물질의 상호작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정신과 물질이 서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함을 말한다.

 

좌선과 행선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 내가 있다는 견해가 사라진다. 내가 있다고 여기고 있는 한 수행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첫번째 통찰은 요원한 것이다. 그래서 우 조티카 사야도는 첫번째 통찰에 대하여 수행자가 이 통찰에 이르지 못한다면 발전할 희망이 없습니다.”(136)라고 했다.

 

내가 있다는 견해를 버렸을 때

 

위빠사나를 처음 접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한국명상원의 전신인 한국위빠사나 선원에서 처음으로 묘원선생에게서 접했다. 이후 2016년 도이선생으로부터도 배우고, 2019년 미얀마에도 다녀왔고, 같은 해 직지사에서 집중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척이 없다.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려면 절박감이 있어야 하는데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되었을 때 진척이 있을 수 없다. 이러던 차에 마침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행선과 관련하여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이라는 말에 자극받았다. 6단계 행선에 대한 것이다.

 

수행하는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수행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다. 노력한 만큼 거둘 것이다. 좌선을 30분 이상 해야 하고, 행선을 30분 이상 해야 한다. 특히 행선은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해야 한다. 행선은 인내 없으면 하기 힘들다. 30분 이상 듬듬듬, 감감감, 놓음놓음놓음이라며 명칭 붙여서 하면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수행해서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6단계 행선한다고 하여 같은 동작을 지루할 정도로 무수히 반복하여 얻는 것은 무엇일까? 평좌하고 앉아 있는 것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일단 첫번째 지혜를 얻어야 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견해청정이다.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다면 보면 어느 순간 아루어질지 모른다. 이렇게 되었을 때 내가 있다는 견해는 버려지게 될 것이다. 견해청정이 되었을 때 진정한 위빠사나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다. 첫번째 통찰이 일어나기 전에는 수행자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나는 언제나 진정한 수행자가 될까?

 

 

2021-08-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