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전자공학으로 본 부처님 가르침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5. 07:34

전자공학으로 본 부처님 가르침


새벽이다. 세시대에 깼다. 더 잘 수 있지만 많이 잔 것 같다. 흙탕물이 가라앉듯 정신이 맑은 시간이다. 이런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없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스마트폰 자판을 똑똑 치는 것이다.

지상에서 편한 자세로 자판을 친다. 엄지가는 대로 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쓸 것인지는 정해졌다. 그러나 알 수 없다.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엄지에 달려 있다. 엄지 가는 대로 쓰는 거다.

한번 치고 생각하고 또 한번 치고 또 생각해 본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리에 대한 갈증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수행과 관련된 책을 보게 된다. 수행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찰나에 사무쳐라.”이 말은 초기불교 교학과 수행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찰나를 보라는 것이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려 하듯이,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찰나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 쿤달라 사야도의 법문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상의 정지하는 성품에 마음을 겨냥하라.”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 66)

 


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오온의 생멸에 대한 것이지만 수행에서는 좌선에서의 호흡과 행선에서의 발움직임이 이에 해당된다.

어떻게 해야 정지를 볼 수 있을까? 잘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찰나를 보는 것이다. 발생하면 반드시 소멸하게 되어 있는데 그 중간에 휴지기가 있다는 것이다. 호흡에서는 쉼에 해당된다. 쉼을 보자는 것이다.

호흡은 일어남, , 꺼짐 순으로 진행된다. 이는 끊임이 없다. 살아 있는 한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 마치 빨래줄처럼 매끈하게 끊어짐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호흡을 관찰해 보면 일어남, 휴지, 꺼짐이라는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호흡관찰 해보면 어떤 때는 디지털 논리가 연상된다. 디지털 논리는 1 0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양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한 것이다. 또한 생성과 소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결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끊어져 있다는 것이다.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과거 회사 다닐 때 전자제품을 개발했었다. 구체적으로 셋톱박스를 말한다. 지금도 관련 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쇄회로기판설계업이다. 전자산업은 대략 2000년을 전후하여 아날로그시대와 디지털시대로 갈렸다. 나는 80년대 말부터 개발했었는데 아날로그 세대라 할 수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다른 것이다. 아날로그는 끊김이 없어서 매끈하다. 반면 디지털은 끊김이 있다. 이는 TV에서도 확인된다.

아날로그TV는 신호가 약하면 흐릿하게 나온다. 선명하지 않고 보일 듯 말듯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디지털TV는 모자이크 현상이 발생한다. 화면이 깨지는 현상을 말한다. 신호가 아주 약하면 블랙이 된다. 화면이 끊기는 것이다.

 


디지털은 1 0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한 것이다. 이진법 논리로 되어 있다. 조건에 따라 1이 되기도 하고 0이 되기도 하다. 전자공학에서는 이를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 원리로 설명한다. 디지털논리와 수행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 사마타는 아날로그 같은 것이고, 위빠사나는 디지털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 그런가? 사마타는 끊김이 없다. 마치 줄처럼 매끄럽게 주욱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행중에 빛과 같은 니밋따를 보았다면 끊김이 없이 하나의 대상을 계속 보고 있을 것이다. 반면 위빠사나는 끊김을 보는 것 같다. 달리 말하면 생성과 소멸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생성과 소멸사이에 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쉼이 있어서 끊어져 보이는 것이다.

사야도는 왜 쉼을 보라고 했을까? 거기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진리를 말할까? 위빠사나 지혜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무상, , 무아에 대한 것이다. 이를 불교적 지혜라고 한다.

호흡에서 일어남과 꺼짐 사이에 휴지기가 있다. 그러나 극히 짧기 때문에 알아차리기 힘들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이다. 그래서 모든 현상은 생성되자 마자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호흡에서 일어남과 꺼짐 다음에 쉼이 있다는 것이다. 이 쉼은 인터벌이 있다. 이 인터벌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호흡에서 쉼이 길면 망상이 치고 들어오기 쉽다. 이럴 때는 닿음을 관찰하라고 한다. 무릎이나 엉덩이 닿음을 말한다. 그래서 일어남, 꺼짐, 닿음식으로 왼쪽과 오른쪽 무릎과 엉덩이를 번갈아 명칭 붙여 관찰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쉼을 관찰하는 것에 대하여 무상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

무상은 항상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호흡에서 일어남, 꺼짐, 쉼을 관찰할 때 쉼을 보는 것은 무상을 보는 것이다. 꺼짐 다음에 다시 일어남이 시작되는데 그 사이에 쉼을 보는 것도 해당된다.

쉼을 관찰하는 것은 무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있는 것에서 없는 것을 보기 위함이다. 마치 서편제 한장면 같다.

영화 서편제를 보면 돌담길에서 한바탕 신나게 노는 장면이 있다. 딸은 창을 하고 아버지는 어깨춤을 추고 아들은 장고치는 장면이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난 다음 화면에는 돌담길만 남아 있다. 마치 텅빈 객석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도 무상일 것이다. 전에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다.

 


현상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수행을 하는 것은 무상을 보기 위함이다. 알아차림 하는 것은 쉼을 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호흡에서는 일어남, 꺼짐, 쉼 순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이 더 예리하다면 일어남과 꺼짐 사이의 휴지기도 관찰이 가능할 것이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아가고 내리고 닿고 누르는 행위가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석해 보면 끊김이 있다. 발을 들어서 올릴 때 끊김이 있고, 올려서 나아갈 때 역시 끊김이 있다. 이런 끊김을 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끊김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고도로 집중해야 한다. 이를 카니까사마디 (khaika samādhi)라 하여 순간삼매 또는 찰나삼매라고 한다.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사마타에서는 무상을 볼 수 없다. 끊김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부처님 가르침은 디지털 논리와 같은 것이라고. 왜 그런가?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아닌 조건발생을 말한다.

 

전자공학에서 0 1이 되게 하려면 다이오드의 애노드에 0.7볼트를 흘려 주면 된다. 이는 조건을 주는 것이다. 전압이 0.7볼트 이상이 되면 도체에 전류가 흘러서 도통하게 된다. 0에서 1이 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된다. 연기법도 이와 유사하다.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은 조건법이다. 이는 조건발생하는 법임을 의미한다. 십이연기는 조건발생의 순환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조건을 차단하면 끊어지게 되어 있다. 이는 열반으로 갈 수 있는 희망의 메세지와 같다.

만일 끊김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열반은 있을 수 없다. 사마타는 끊김이 없다. 그래서 해탈은 가능하다. 그러나 끊김이 없기 때문에 열반은 가능하지 않다. 열반은 끊김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끊김이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열반을 실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조건 발생하기 때문에 끊김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생멸이다. 끊임없이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생성과 소멸사이에 쉼이 있는데, 이 쉼을 보면 무상을 볼 수 있다. 무상을 보면 고와 무아도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A9.20)라고 말했을 것이다.


2021-08-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