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허리아픈 환자처럼

담마다사 이병욱 2021. 8. 17. 09:18

허리 아픈 환자처럼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허리 아픈 환자처럼이라는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 본 말이다. 우 쿤달라 사야도의 위빠사나 수행자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있는 말이다. 마하시 사야도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사야도는 왜 허리 아픈 환자처럼 하라고 했을까? 이는 일상에서 사띠에 대한 것이다. 좌선이나 행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데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환자처럼 하라고 했다. 특히 허리 아픈 환자처럼 하라는 것이다.

허리는 몸의 중추이다. 허리가 삐끗해서 통증이 발생되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일어나는 것도 천천히 해야 하고 앉는 것도 천천히 해야 한다. 빠릿빠릿하게 할 수 없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날 수 없다. 몸을 옆으로 한 다음 한쪽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나야 한다. 옷을 입을 때도 천천히 입고, 밥을 먹을 때도 천천히 먹어야 한다.

천천히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먼저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의도를 알아차린다고 하여 곧바로 행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행위가 있은 다음에 알아차림이 이어진다. 행선에서 뒤로 돌고자 할 때 알 수 있다. 의도를 알아차리고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아차려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의도를 알아차리면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의도는 정신적인 것이고, 움직임은 물질적이라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몸은 물질로 된 것이기 때문에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다. 정신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나의 몸과 마음은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유물론자들을 말한다. 정신은 육체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뇌과학자들도 이렇게 말한다. 이를 과학적 유물론이라 말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라면 죽을 때 어떻게 될까? 몸의 기능이 망가져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정신도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유물론자들은 천당이 어디에 있고 지옥이 어디에 있어? 죽으면 끝이지.”라고 말한다.

부처님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로 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앞서간다고 보았다. 의도가 있으면 행위가 뒤따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다. 의도하면 행위를 하고. 행위를 하면 알아차림이 뒤따름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는 육체적 행위만을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행위도 해당된다.

알아차림에는 네 가지가 있다.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을 말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몸관찰(身念處)하는 수행을 한다. 좌선과 함께 행선을 중시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또 일상에서 사띠하는 것도 좌선과 행선 못지않게 중시한다. 이는 오로지 느낌만 알아차림 하는 고엔카방식과 다른 것이다. 또한 오로지 마음만 알아차림 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오로지 느낌만 알아차림 한다면 좌선만 해야 한다. 행선은 없는 것이다. 사마타 수행하는 수행처에도 행선은 없다. 위빠사나 수행처라도 몸관찰이 없는 곳이라면 하루 종일 좌선만 할 것이다. 행선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포행은 있을 것이다. 몸을 푸는 것을 말한다. 좌선의 피로를 짧게 푸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요시한다. 어느 정도일까? 이는 좌선과 행선비율을 일대일로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좌선 한시간 하면 행선 한시간 하는 식이다. 미얀마 수행처에서는 짝수시간은 좌선이고 홀수시간은 행선 시간이다. 그러나 수행이 깊어지면 좌선시간은 늘어난다.

마하시전통에서 행선을 중요시하는 것은 몸관찰이 주요한 수행방법이기 때문이다. 호흡관찰을 해도 콧구멍 주변에 집중하지 않는다. 단지 호흡만 보면 사마타가 된다. 호흡이라는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배의 일어남과 꺼짐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움직임 관찰에 해당된다. 몸의 풍대에 대한 것이다.

풍대관찰은 행선에서도 이어진다. 그런데 행선하면 풍대뿐만 아니라 사대를 모두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을 올릴 때는 가벼운 느낌이어서 풍대요소가 강하고 발을 디딜때는 무거운 느낌이어서 지대요소가 강하다. 좌선과 행선을 통해서도 사대를 관찰할 수 있다. 이는 다름아닌 사대의 성품관찰이라 할 수 있다.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성품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품을 알고자 할까?

위빠사나 수행은 성품을 아는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성품인가? 근본성품(paramattha dhamma)을 말한다. 불성이나 영혼같은 개념이 아니다. 실재하는 고유의 성품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행선에서 발의 움직임을 통해서 풍대 등 사대를 안다면 이는 근본 성품을 아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성품을 알아서 어쩌자는 건가?

사람들은 힘들게 명상홀에 앉아 있다. 또 사람들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힘들게 행선한다. 대체 이들은 어떤 목적으로 재미도 없고 심심해 보이는 좌선과 행선을 지리해보일 정도로 반복하는 것일까? 그것은 근본성품의 고유한 특성을 보고자 함이다. 성품이 일어나고 사라는 것을 통해서 성품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다.

성품이라 하여 불성이나 영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품을 보자는 것은 어떤 변치 않는 영혼과 같은 개념을 보자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풍대 등과 같은 사대성품을 보아서 무상, , 무아를 보자는 것이다. 근본성품을 보면 영혼과 같은 개념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 자아, 중생, 남자, 여자, 영혼, 하느님과 같은 말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개념인 것이다.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은 모두 실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자신의 이름도 개념이다. 하나님도 개념이다. 이름만 있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근본성품이다. 몸의 사대뿐만 아니라 마음의 탐욕이나 성냄 등도 근본성품에 해당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가 모두 빠라맛타담마(窮極的實在)가 된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다.

 

성품이 실재한다고 해서 영원히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성품은 없다. 개념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영혼이나 하나님은 개념이기 때문에 항상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다. 명칭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본성품은 실재하는데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는 사실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결국 생멸하는 실재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다. 실재하는 성품을 보기 위해 좌선을 하고 행선을 하고 일상에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실재하는 성품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통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찰이 생겨나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매일 매순간이 새로울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좌선과 행선을 할 것이다. 똑같은 행위를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는 것은 실재하는 성품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불성이나 영혼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그런 것은 없다. 실재하는 성품을 보아 그 성품이 무상, , 무아임을 통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첫번째 통찰이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이다.

정신과 물질은 하나가 아니라 구분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의도하면 행위가 따르고, 행위를 하면 알아차림 하는 것도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면 본능적이 될 것이다. 동물적 감각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과 달리 정신이 발달되어 있어서 자신의 행위를 알 수 있다. 또한 행위를 안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도 된다. 그래서 알아차림하면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중에서 제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와 제2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일상에서는 허리아픈 환자처럼 행위하라고 했다. 이는 일상에서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알아차림 하라는 말과 같다. 동작이 민첩하면 알아차리기 힘들다. 동작을 빠르게 했을 때 알아차리기 힘들다. 운동선수들은 동물적 감각이 탁월하다. 본능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는 아픈 환자처럼 행위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행위 전과정을 알 수 있다.

허리아픈 환자처럼 행위하면 여러 이점이 있을 것 같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에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하면 실수할 수 있다. 일을 급하게 할 때 그렇다. 급하게 하다 보면 사고가 난다. 사고는 순간적이다. 그러나 허리아픈 환자처럼 행위하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특히 노년에 그렇다.

노년에 사고 나면 회복불능이 될 수 있다. 목욕탕에서 넘어져 대퇴부 골절상을 입었다면 누워지내야 한다. 길을 가다가 넘어질 수 있다. 조금만 방심해도 사고날 수 있다. 이럴 때는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허리 아픈 환자처럼.


2021-08-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