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 할 때 “들음들음”한다면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밥을 먹고 돌아온 것이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본 영화 ‘그들만의 리그’에서도 “여기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라는 대사를 보았다. 시골에서 살기 보다는 더 큰 세상으로 나가 고픈 것을 말한 것이다. 집이라는 울타리를 떠나 집 밖으로 나가고자 할 때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라고 한 것이다.
저녁시간은 들뜨기 쉽다. 집에서 TV나 시청하고 있으면 하루가 허무하게 끝나는 것 같다. 저녁시간도 활용해야 한다. 운동은 하지 않는다. 책을 읽어도 좋고 글을 써도 좋고 명상을 해도 좋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집에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차를 끓였다. 오늘 저녁 차는 ‘모은 암황차’이다. 이계표 선생이 준 것이다. 지난달 광주에 갔었는데 그때 선물로 받은 것이다. 한마디로 구수하다. 보이차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다. 보이차는 강렬하다. 그러나 황차는 구수해서 입맛에 딱 맞는다. 토종 차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게 한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TV나 유튜브 시청 등으로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 남는 것을 해야 한다. 글쓰기만한 것이 없다. 어느 것을 써야 할까?
최근 읽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 인상적인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일상생활사띠에 대한 것이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앉아서 하는 것만은 아니다. 행선도 있지만 생업을 가진 자에게 있어서, 재가의 삶을 사는 재가수행자에게 있어서 일상사띠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상사띠를 할 것인가? 이를 “봄봄”과 “들음들음” 두 개의 명칭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상사띠 핵심은 감각능력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눈과 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이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과 마주쳤을 때 알아차림 해야 한다. 그런데 시각과 청각이 핵심이라는 사실이다. 다섯 감각능력 중에서 시각과 청각에 대한 것이 거의 대부분 차지한다. 시각과 청각만 알아차려도 일상에서 사띠는 성공적이라 볼 수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다. 책에서는 일상사띠에 대하여 “봄봄”과 “들음들음”하라고 했다. 시각대상을 접했을 때는 “봄봄”하며 명칭 붙이고, 청각대상을 접했을 때는 “들음들음”하며 명칭 붙이라는 것이다. 초기에는 이렇게 명칭을 붙이면 좋다. 수행초기에는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명칭을 붙이면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매혹적인 대상을 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초보수행자라면 “봄봄”이라고 명칭을 붙여서 대응하는 것이 좋다. 대상에 대하여 “봄봄”하다 보면 끄달리지 않는다.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다.
“봄봄”이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매혹적인 대상에 대한 즐거운 느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알아차린 마음이 나중 마음이 되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된다.
대상을 볼 때 마다 “봄봄”하면 대상이 흐릿하게 보일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알아차림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대상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단지 사람형상만 보일지 모른다. 어떤 매혹적인 형상에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시각 다음으로 많은 것은 청각이다. 소리를 들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듣기 싫은 뉴스를 들었을 때 피해야 할까? 이럴 때 “들음들음”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명상하다 보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반사적으로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럴 때는 “들음들음”하는 것이 좋다.
들을 때마다 “들음들음”하며 알아차려야 한다. 일상에서 “들음들음”하다 보면 들리지 않을 수 있다. 회의시간에 “들음들음”한다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회의할 때는 회의에만 집중해야 한다. 이럴 때 지침서에서는 “전체상황을 개괄적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한다.
소리에 대하여 “들음들음”하며 알아차림 하면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들을 것이다. 마치 “봄봄”하면 형상이 흐릿해지듯이, “들음들음”하면 소리가 파동으로만 들릴 것이다. 마치 “너는 떠들어라. 나는 흘린다.”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들음들음”을 일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부부싸움 할 때를 말한다.
부부싸움하면 말싸움이 되기 쉽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소리에 대하여 “들음들음”이라고 알아차림 하면 무슨 말하는지 파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화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은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S7.3)라고 했다. 부부싸움할 때 딱 들어 맞는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화내는 이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할까? 이는 화내는 이의 말에 대하여 “들음들음”하면 될 것이다. 상대방은 화가 나서 떠들지만 듣는 이는 “들음들음”하며 알아차림 하면 오래 가지 않는다. 싸움은 치고 받아야 하는 것인데 받기만 한다면 싸움이 이어지지 않는다. 부부싸움 할 때 “들음들음”하면 매우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 가르침은 좌선이나 행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활용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좌선이나 행선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면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는다. 일상에서도 함께 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사띠하는 것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봄봄”이라 하고, 듣기 싫은 것에 대해서는 “들음들음”이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Ud.6)
우다나에 실린 ‘바히야의 경’을 보면 일상에서 사띠 만으로도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첫 출발점은 명칭붙이는 것이다. 초보자는 사띠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봄봄” “들음들음”하며 명칭 붙이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평일저녁 주어진 한시간 동안 글을 썼다. 이렇게 써 놓으면 남는다. TV나 유튜브시청으로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무엇이라도 써 놓으면 남는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동안에 마음이 청정해진다는 사실이다. 늦은 밤 주어진 한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신나게 자판을 두들겨 보았다.
2021-08-09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신은 있을까 없을까? (0) | 2021.08.16 |
---|---|
전자공학으로 본 부처님 가르침 (0) | 2021.08.15 |
같은 동작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0) | 2021.08.01 |
깜박깜박할 때가 있는데 (0) | 2021.07.28 |
사띠는 담마를 기억하는 것 (0) | 2021.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