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는 담마를 기억하는 것

담마다사 이병욱 2021. 7. 24. 07:29
사띠는 담마를 기억하는 것

사띠는 기억이다. 오늘 새벽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왜 사띠가 기억인가? 사띠(sati)의 본래 뜻이 기억을 뜻하는 메모리(memory)인 것이 큰 이유이다. 무엇을 기억하는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담마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늘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담마를 왜 기억해야 하는가? 담마를 기억해야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다. 가부좌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이 수헹의 전부는 아니다. 일상에서도 수행해야 한다. 어떻게 일상에서도 수행이 가능할까? 그것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상에서도 사띠하는 것이다.

어제 책을 읽었다. 수행과 관련된 책이다. 빤냐완따 스님이 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책이다. 받은지 오래 되었다. 책만 받고 읽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소설 읽듯이 하루만에 다 읽을 수 없다. 조금씩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책과 함께 읽는 것이다. 그래서 책상 한켠에 읽어야 할 책이 여러권 쌓여 있다.

책에서는 사띠와 관련해서 사념처가 소개 되어 있다. 수행관련 책에서 수없이 본 것이다. 그럼에도 스님이 준 책에서 절실히 다가 왔다.

몸관찰은 호흡뿐만 아니라 앉거나 걸을 때도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호흡관찰은 앉아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을 때는 호훕관찰은 불가능하다. 경행을 할 때는 발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행선이 몸관찰의 영역에 포함되는 이유일 것이다.

수행은 몸관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느낌관찰도 있고, 마음관찰도 있고, 법관찰도 있다.

느낌관찰은 감각관찰이라고 볼 수 있다. 아픈 것을 관찰하는 것도 느낌관찰에 해당된다. 시리고 쓰리고 쑤시고 찌르는 듯한 느낌을 말한다. 느낌에는 괴로운 느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느낌도 있다. 평온하고 안은한 느낌도 관찰대상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집착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저 지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관찰도 일상에서도 적용가능하다. 느낌관찰이라 하여 반드시 앉아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관찰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탐욕과 분노 등 온갖 마음부수가 대상이 된다. 선심도 있고 불선심도 있다. 경에서는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다. 한번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또 한번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 탐욕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나에게 탐욕의 마음이 일어 났다고 알아차려야 한다.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알아차린 그 마음을 한번 더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이중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내가 있다'는 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마음관찰은 이중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서적을 보면 이중사띠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없다. 경전에서는 분명히 두 번 알아차리라고 했는데 수행관련 서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유를 알 수 없다.

마음관찰이라 하여 단지 현재 마음만 안다면 다른 관찰과 다를바 없다. 마음관찰이 다른 관찰과 차별화 되는 것은 한번 더 알아차리는 것에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성냄에 매인 마음을 성냄에 매인 마음이라고 분명히 알고,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을 성냄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D22.19)라고 했다.

가장 난해한 것은 법관찰이다. 범위가 너무 넓다. 그러나 경을 보면 범위가 한정된다. 법이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을 다 말하는 것이 된다. 법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범위를 정해야할 필요가 있다. 경이나 수행지침서에서는 공통적으로 여섯 감각영역을 관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대상이 모두 관찰대상이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관찰대상이 된다. 여섯 감각기관이 여섯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법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관찰대상이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가르침도 관찰대상이 된다. 여섯 감역은 소문자를 써서 작은 법(dhamma)이라고 한다면 가르침은 대문자를 써서 큰 법(Dhamma)이라고 할 수 있다.

앉아 있는 것만이 수행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수행해야 한다. 호흡관찰을 제외하고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은 일상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몸관찰이 무엇인지 알아야 몸관찰할 수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석을 보아야 한다. 수행지침서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수행지도를 받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네 가지 관찰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생멸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호흡관찰하면 호흡의 생멸을 볼 수 있다. 행선할 때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정신과 물질의 생멸을 볼 수 있다. 느낌도 생멸이고 마음도 생멸이고 법도 생멸이다. 생멸을 관찰하여 모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이런 지혜가 생겨나면 세상 어떤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늘 사띠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어떻게 사띠를 유지한단 말인가? 늘 호흡관찰할 수 없다. 호흡관찰은 앉아서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행주좌와와 어묵동정간에 사띠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억밖에 없다. 가르침의 기억을 말한다.

경에 있는 것도 기억하고 주석에 있는 것도 기억하고 지침서에 있는 것도 기억하고 스승의 말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체험도 기억해야 한다. 늘 담마를 기억하면 그것이 사띠인 것이다.

2021-07-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