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11. 10:06

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가?

 

 

요즘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졌다. 그러나 질은 좋지 않다. 앉아 있는지 10분에서 20분 사이에 일어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효과는 있다. 일단 흙탕물이 가라 앉는 것 같다. 그 짧은 시간에도 마음이 어느 정도 정화되기 때문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에 임하면 효율적이다. 혼란한 마음으로 일을 대하는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일하기 전에 먼저 5분 또는 10분이라도 눈을 감고 앉아 있는다고 한다.

 

틈만 나면 앉아 있는다.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눈을 감고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호흡을 따라가면 번뇌망상은 없어진다. 그러나 연습이 잘 되지 않아서 그 짧은 틈 사이로 번뇌망상이 치고 들어온다. 그러나 호흡을 붙들고 있는 한 짧게 머물다 사라진다. 마치 송아지가 말뚝에 끈으로 묶어져 있는 것과 같다.

 

세상이 발생되는 원리

 

10분이고 20분이고 짧게 앉아 있다 보면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다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눈을 뜨는 것으로 설명했다. 눈을 뜨면 시각대상을 보게 되고, 그에 따라 시각의식이 생겨나는데 이를 삼사화합이라고 했다.

 

삼사화합까지는 좋고 싫음이 없다. 그 다음이 문제가 된다. 삼사화합촉이 일어 났을 때 느낌이 발생되는데, 여기서 느낌은 세 가지이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면 거머 쥐려 하고, 괴로운 느낌이면 밀쳐 내려 한다. 전자를 탐욕이라고 하고, 후자를 성냄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중생살이가 시작된다.

 

중생살이의 끝은 어디일까? 절망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35.10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현세에서 지옥을 맛볼 때

 

우리는 절망열차를 타고 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결론은 절망이다. 죽음이라는 절망이라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대수명을 말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늘 죽을 수 있다. 오늘 죽을 수 있다면, 아니 한시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면 가만 있을 수 없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즐거움에 빠지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하면서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지금 이순간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른다. 경에서는 지옥이나 축생에 태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도 지옥이나 축생을 맛볼 수 있다.

 

여인들이 잘 차려 입고 승원에 왔을 때 새내기 수행승 방기사는 괴로웠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바로 그 여인들을 보고 나서 존자 방기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이 일어나 욕정이 그의 마음을 괴롭혔다.”(S8.1)라고 했다. 이미 지옥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수행승이 탁발 나갔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입은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S20.10)라고 했다. 이렇게 현세에서도 알아차림을 놓치면 지옥을 맛보게 됨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감각기관의 단속을 설하였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은 부처님의 친설임에 틀림없다. 딱 한번 나오고 마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된다고 하여감각능력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있음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S35.239)라고 말했을 때 이는 틀림없는 부처님 말씀이라고 보면 된다.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알면

 

부처님은 번뇌의 소멸에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감각능력의 수호를 말씀하셨다. 매혹적인 형상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려면 가르침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수행해야 한다. 어떻게 이해하고 수행하는가?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수행승들이여,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가?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지각의 발생과 소멸, 형성의 발생과 소멸, 의식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S22.5)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알면 감각능력은 수호된다. 매혹적인 대상도 이를 지각하는 마음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발생했다가 그냥 사라진다. 그럼에도 끄달리는 것은 갈애와 집착이 생겼기 때문이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해 끄달려 간 것이다.

 

삼매에 들면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볼 것이라고 했다. 이는 사념처로도 설명이 된다. 느낌에 대한 것이라면 수념처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발생과 소멸을 관찰해야 할까? 이것 역시 경전에 쓰여 있다.

 

수념처에 따르면 느낌의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느낌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D22.18)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번뇌에 의한 끄달림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번뇌가 일어나는 순간 사띠로 제압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고 싫음에 대한 느낌이 생겨났을 때 단지 느낌이 일어났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즐겁네.”또는 괴롭네.”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좋다고 하여좋아 죽겠네.”라든가, 싫다고 하여 미워 죽겠네.”라고 한다면 갈애에 정복당한 것이다. 결과는 괴로움이고 끝은 절망이다.

 

눈을 감고 가만 앉아 있어 보면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밝아진다.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다. 눈을 감음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안은 하다. 그냥 그대로 있고 싶다. 그렇다고 특별한 체험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이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배고프면 미각의 즐거움을 느낀다. 신체적 접촉에 의한 즐거움도 있다. 그러나 모두 일시적이다. 즐거운 순간이 지나가면 허()와 무()만 남는다.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그 맛을 찾아 가듯이, 즐거움을 찾아보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고 가만 앉아 있어 보자. 앉아 있으면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이는 부처님도 말씀하신 것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뭇삶이 최상의 즐거움과 만족을 누린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이 있다.”(S36.19)

 

 

부처님은 시각이나 청각 등으로 인한 감각적 즐거움보다 더 미묘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삼매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초선정에 대하여 아난다여, 세상에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윔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든다. 아난다여, 그러한 즐거움 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다른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S36.19)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삼매의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다. 감각적 즐거움은 거친 것이라면 삼매의 즐거움은 미묘한 것이다. 감각적 즐거움은 몸 바깥에서 찾지만 삼매의 즐거움은 몸 안에서 찾는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설령 삼매에 들어가지 못했을지라도 감각의 문을 닫아 놓았기 때문에 번뇌가 들어오지 못한다. 의식의 문 하나만 열어 놓고 있다. 의식의 문은 호흡관찰을 함으로 인하여 통제된다. 이렇게 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설령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금방 알아차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수행 초보자이다. 사무실에 명상공간이 있어서 틈만 나면 앉아 있는다. 이전과 비교해서 앉는 빈도도 많아 졌다. 그러나 깊이는 없다. 그럼에도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점차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최후의 말씀에서 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했다. 자귀의와 법귀의를 말한다. 세상에 의지해야 할 것은 자신과 가르침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나의 안전은 내가 지킨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D16.54)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외롭다고 말한다. 특히 나이 든 노인들이 외롭다고 말한다. 배우자가 사망한 경우 외로움을 더 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외롭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은 것이다. 배우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나 결국 혼자가 된다. 설령 배우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있게 된다. 부모와 형제, 자식이 있어도 결국 혼자인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것이 없다. 의지할 것이 있다면 자신과 가르침(Dhamma)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왜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은 최후의 말씀에서 자귀의(自歸依)와 법귀의(法歸依)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법귀의보다 자귀의를 앞세운 것일까? 이는 최종적으로 믿을 것은 자신 밖에 없음을 말한다.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할 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때가 되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상인이 훌륭한 말을 다루듯,

그대는 자기자신을 다스리라.”(Dhp.380)

 

 

부처님은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했다. 이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어떤 뜻일까?

 

어느 누구도 나의 고통을 함께 할 수 없다. 부모, 형제, 자식이 있어도 누구도 나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선업공덕도 자신이 쌓는 것이다.

 

황금만능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다. 타인을 시켜서 천상계에 태어나게 하거나 도와 과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황금도 의지처가 되지 않는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남에게 의지하거나 또는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다. 특히 죽음의 문제 같은 경우 타인에게도 황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가르침에 의지하더라도 결국 자신에게 달려 있다.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해 내지 않으면 안된다. 도와 과를 이루는데 있어서 부처님도 도와주지 않는다. 스스로 힘으로 해내야 한다. 마치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자신을 의지처로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안내자로 해야 한다. 자신을 안내자로 한다는 것은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함을 말한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어 가게 되어 있다. 예류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의지처로 삼게 됨을 말한다.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일곱생 이내에 열반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라고 했다.

 

불교는 자력종교이다. 이는 타력에 의존하는 유일신교와 다르다. 또 같은 불교라도 타력에 의존하는 관세음보살사상이나 아미타사상과도 다른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D16.54)고 했다.

 

자기가 자기자신에게 의지하려면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기 전에는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즉 수다원이 되면 이제는 다른 것에 의지할 것이 없다. 마치 뗏목을 더 이상 이고 갈 것이 없는 것이 된다. 그 길로 주욱 가다 보면 일곱생 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된다.

 

수행자는 외롭지 않고 고독할 뿐이다

 

수행자는 외롭지 않다. 수행자가 외로움을 탄다면 더 이상 수행자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수행자는 고독할 뿐이다. 그것은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고독하다. 수행자는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다. 수행자는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행자는 어느 순간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자신을 의지처로 삼았을 때 더 이상 타인에게 의지할 것이 없다. 처음에는 가르침에 의지하지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순간 이제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 사는 것이다. 수행자는 외롭지 않고 다만 고독할 뿐이다. 오늘도 조용히 요가 매트 위에 앉아 본다.

 

 

자신을 다스리고

언제나 자제하며 사는 자,

자신을 이기는 자가

다른 사람을 이기는 자보다 낫다.”(Dhp.104)

 

자신이야말로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리.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이고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이다.

상인이 훌륭한 말을 다루듯,

그대는 자기자신을 다스리라.”(Dhp.380)

 

 

2021-06-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