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하면 욕을 먹고
누군가 나에게 지적하면 발끈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나를 겨냥한 것이라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이럴 경우 대부분 반격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타격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공격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단점이나 약점을 지적하며 반격한다면 하수이다. 공부가 덜 된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이럴 때 흔히 하는 말은 “지금 내 마음을 잘 살펴보십시오.”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 심호흡을 하라고 말한다.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즉각적 반응을 보낸다면 하수이다. 공부가 된 고수라면 인터벌을 줄 것이다. 그 화난 마음을 이전마음으로 돌리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원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뒤의 마음이 앞의 마음을 안다면 이는 사띠(sati)가 된 것이다. 사띠는 바로 한찰나 이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발끈했다면 그 발끈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그런데 심념처에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알아차린 마음을 또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이렇게 두 번 알아차렸을 때 알아차린 마음이 ‘내마음’이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게 된다.
분노하고 성내고 발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인을 따져보면 거기에는 항상 “나(我)”가 있다. 그래서 분노도 ‘나의 분노’가 된다. 여기서 ‘나’를 떼어 놓으면, 나의 분노는 그냥 분노 그 자체가 된다.
분노는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난 분노는 조건이 다하면 사라진다. 그럼에도 계속 분노하는 것은 분노를 내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분노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한번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면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해보지만 상황은 더욱더 악화될 뿐이다. 무엇보다 내가 괴롭다. 내가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을 때 내가 나를 태워버린다. 이럴 때 사띠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면,
그 때문에 그는 더욱 악해지리.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네.”(S11.5)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대부분 분노는 분노로 되갚아 주기 때문이다.
분노에 분노로 되갚으면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매우 친절하다.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화내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여 고요히 하면
자신을 위하고 또 남을 위하고
둘 다 이익을 위한 것이네.”(S11.5)
새김을 확립하라고 했다. 사띠하라는 것이다. 알아차림 하는 것을 말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호흡을 보는 것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다.
호흡을 보는 것은 수행과 관련이 있다. 지금 가슴에서 콩닥콩닥거리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분노의 마음을 가슴의 콩닥거림에 두는 것이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슴의 콩닥거림을 관찰하면 분노는 이전마음이 되어 버린다.
분노가 일어날 때 부처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접했을 때 분노할 수 없을 것이다.
“분노하는 자는 추악하고
고통스럽게 잠을 이룬다.
또한 이익을 취했지만
그는 불익을 얻는다네.
그러므로 분노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파괴를 일삼고
분노에 정복되어
사람은 재산을 잃는다네.
분노의 취기에 취하여
그는 명성을 잃고
친지와 친구, 벗들은
분노하는 자를 피하네.
분노는 불익을 생겨나게 하고
분노는 마음을 동요시킨다.
안으로 생겨난 위험을
그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분노하는 자는 이익을 알지 못하고
분노하는 자는 원리를 알지 못한다.
분노가 사람을 정복하니
그때 암흑과 맹목이 그를 지배하네.
분노하는 자가 파괴를 일삼으면
쉽게 부수든 어렵게 부수든
나중에 분노가 떠난 후에
불에 연소된 것처럼 괴로워하네.
분노가 폭발하여
젊은이가 질책하면
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듯,
그는 당혹한 모습을 보인다.
부끄러움도 없이 창피함도 없이
공경도 없이 말을 지껄이니
분노에 정복되어
결코 섬을 발견하지 못하네.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고통스런 업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가르치니
그것을 잘 들어야 하리.
분노야말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어머니를 살해하고
분노야말로 성직자를 살해하고
분노는 또한 어리석은 범부를 살해하네.
어머니의 양육으로 사람은
이 세계에 태어났는데,
그 생명을 부여해준 존재를
분노한 어리석은 범부가 살해하네.
그 뭇삶들은 자신을 친구로 삼으니
자신이 가장 사랑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네.
그러나 많은 다양한 것에 미혹되어
분노하는 자는 자신을 살해하네.
미혹된 자들은
칼로 자신을 죽이고 독을 삼켜 죽고
밧줄에 묶어 죽거나
산의 협곡에 떨어져 죽는다.
존재를 살해하고
자신을 살해하는 업을 짓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분노에서 파멸이 생겨나네.
분노에서 숨겨진
죽음과 밧줄이 생겨나니
자제와 지혜와 정진,
그리고 올바른 견해로 끊어야 하리.
현명한 자라면, 이 하나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끊어버려야 하리.
이처럼 가르침을 배워야 하리.
결코 당혹해 하지 말라.
분노를 여의고 절망도 여의고
어리석음을 여의고 탐욕을 떠나
자제하는 자는 분노를 버리고
번뇌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네.”(A7.64)
분노는 어떤 식으로든지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분노할 수 없을 것이다. 분노가 자기파멸적으로 작용한다는 가르침을 기억하면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호흡을 보아도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담마를 기억해 보아도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분노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한 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이다.
그가 분노하는 이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자의 흐름에 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극복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성자가 되기 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자아관념이 뿌리 뽑힌다. 무아의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 사람 때문에 이렇게 분노가 치민다면 나는 성자의 흐름 문턱치에도 가 가지 못했다. 욕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을 정도가 되어야 성자의 흐름에 들 수 있다. 작은 도발에 발끈한다면 공부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참사람은 자신에게 단점이 있다면, 누군가 묻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밝힌다. 하물며 물었다면 말해 무엇하겠는가?”(A4.73)
나는 공부가 덜 되었다. 계속 배우고 익히고자 한다. 그래서 단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반성한다. 불리한 것도 밝히는 것이다. 누군가 이를 약점으로 활용한다고 해도 나의 공부를 위해서는 밝히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단점은 드러내야 한다. 반대로 장점은 숨겨야 한다. 이것이 참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정반대로 한다. 자신의 장점은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자신의 단점은 숨기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사람은 상대방의 장점을 깍아 내리려 할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감추려는 사람은 상대방의 단점을 드러내려 할 것이다. 참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렇다. 공부가 덜 된 사람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다.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세상사람들이 탐욕으로 살 때 부처님은 무탐을 설했다. 세상사람들이 분노로 살 때 부처님은 무진을 설했다. 부처님의 무탐, 무진, 무치의 가르침은 확실히 세상사람들의 흐름과 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역류도라고 한다.
세상사람들은 자아개념으로 산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탐, 진, 치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아관념이 무아관념으로 바뀐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느 것 하나 집착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욕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을 것이다.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고 했다. 자비의 마음에 대적할 자가 없음을 말한다. 무탐, 무진, 무치의 성자에게는 자아관념이 없다. 오로지 자비의 마음만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분노의 마음에서 해방될까?
2021-06-0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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