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현재의 물이 물레방아를 굴린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5. 28. 07:39

현재의 물이 물레방아를 굴린다


스마트폰을 보니 새벽 3 17분이다. 참 좋은 시간이다. 앞으로 6시까지는 나의 시간이다. 하루 24시간 나의 시간 아닌 것이 없지만 새벽시간 만큼은 온전히 내것이다. 글 하나 나오기 좋은 시간이다.

늘 기억하고 사유하고자 한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글로 꽁꽁 묶어 놓고자 한다. 그제 들었던 법문도 그렇다. 학인의 자세로 경청했다. 빤냐완따 스님이 현재의 물이 물레방아를 굴립니다.”라고 말한 것에 사무쳤다. 불기 2565주년 붓다의 날에 들은 것이다.

 


스님은 시인 수행승이다. 출가하기 전에 시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시적 감수성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초기경전에서 시인 수행승 방기사 존자를 보는 것 같다.

방기사 존자는 테라가타 대미를 장식하는 대련시집을 남긴 바 있다. 무려 70개에 달하는 게송이다. 읽어 보면 시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시인 스님 빤냐완따 스님은 앞서 언급된 물레방아론을 말하면서 시를 하나 읊었다. 이런 것이다.


지나간 일을 슬퍼하지 하지 않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지 않으며
현재의 삶을 지켜 나가면
얼굴빛은 맑고 깨끗하리.

지나간 일을 슬퍼하고
오지 않은 일에 애태우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시든다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S1.10)


상윳따니까야 숲속의 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하루 한끼 먹는 수행승의 얼굴이 어떻게 맑고 깨끗할 수 있을까? 이는 마음이 늘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편안하지 않다. 왜 그런가?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후회와 회환의 감정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근심과 걱정에 지배될 것이다. 둘 다 마음이 현재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맥 빠진다. 이는 명상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마음의 문만 열어 두었을 때 온갖 잡념이 일어난다. 그 짧은 순간에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어떤 것은 강렬해서 집을 짓기도 한다. 갈애를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오도송이라 불리는 법구경 게송에서는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Dhp.154)라고 했다.

망상의 집을 지으면 힘이 든다. 생각의 무게를 느낀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허공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후회와 회환, 그리고 근심과 걱정이라는 집을 말한다. 그래서 낫에 잘린 갈대처럼”(S1.10)시든다고 했을 것이다.

집을 짓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면 된다. 명상자라면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마음은 현재에 있게 된다. 그래서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Dhp.154)가 될 것이다. 갈애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154)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 있을 수 없다. 평상시가 중요하다. 일상에서 어떻게 집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좌선을 할 때는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면 잡념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일상에서는 눈이나 귀 등으로 끊임없이 대상을 접하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대상에 끌리지만 때로 혐오적 대상에 직면하기도 한다. 이럴 때 번뇌가 발생한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진검 승부는 일상에서 발생한다. 눈감고 앉아 있는 것과 상황은 다르다. 찰나찰나 생성되는 대상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깨지고 만다.

제아무리 오랜 세월 수행했다고 하더라도 매혹적 대상이나 혐오적 대상을 접하면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빤냐완따 스님은 깨달음은 좌선에 있지 않고 일상생활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빤냐완따 스님이 이렇게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작년 7월 스님을 공양청 했다. 성남시 천림산에 있는 스님의 처소를 법우들과 함께 찾아 간 것이다. 그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스님이 미얀마에서 한수행하고 인도여행 했는데 그곳에서 무참히 깨졌다는 것이다. 달라붙는 거지떼에게 화를 낸 것이다.

수행처와 현실세계는 다르다. 산중에서 도만 닦은 자가 저자거리에 나왔을 때 무참히 깨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안거가 끝나면 만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공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마음이 항상 현재에 있어야 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피곤하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다면 걱정이 없어서 좋겠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걱정은 걱정을 내려 놓을 때 걱정이 없게 된다.

후회와 회환, 근심과 걱정은 불선법이다. 불선법은 불선업이 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불선과보를 받는다. 지금 당장 받을 수도 있고 먼 훗날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좌선하고 있다면 간단히 제압될 것이다. 문제는 일상에 있을 때이다.

일상에서 경계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는 가르침을 기억해 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M20)라고 말씀 하셨다. 마치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독을 독으로서 제독하는 것과도 같다. 사유로서 사유를 제압하는 것이다.

사유 자체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깨달음의 길에 있어서 사유는 놓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유도 사유 나름이다. 착하고 건전한 사유가 있는가 하면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도 있다. 대개 후자가 힘이 세다.

착하고 건전한 사유를 하면 마치 작은 쐐기로 큰 쐐기를 쳐내는 것과 같다. 착하고 건전한 사유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마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알 수 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하지 못한다. 앞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앞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후회와 회환도 그것이 후회와 회환인 줄 안다면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근심과 걱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음을 늘 현재에 두면 후회와 회환,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사띠의 힘이 약하면 소용없다.

사띠(sati)란 무엇일까? 두 가지로 본다. 수행중의 사띠와 일상에서 사띠를 말한다. 좌선할 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마음은 현재에 있게 된다. 후회와 회환,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된다. 이를 수행에서 사띠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복부를 관찰할 수 없다. 이럴 때는 가르침을 기억해 내야 한다. 어떤 경계에 직면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을 떠 올리는 것이다. 또 가르침을 경험했던 것을 떠 올려야 한다. 그래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무상, , 무아로 보아야 한다.

수행에서 체험했던 것을 일상에서 활용해야 한다. 좌선 따로 일상 따로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좌선하다 보면 다리가 저린다. 아마 수행 초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한시간 앉아 있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시작한지 10분도 안되어서 혼침이 왔다. 졸려서 견딜 수 없다. 그대로 매트에 누웠다. 한참후에 일어나서 다시 좌선에 임했다. 마음이 맑으니 집중이 잘 되는 것 같았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했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다 보면 마음은 움직임을 따라 가게 된다. 마음이 부품과 꺼짐에 붙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송아지를 기둥에 묶어 둔 끈이 이어졌다 풀어졌다 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이다.


예를 들면, 목우자가 야생의 암소 모든 우유를 삼키고 성장한 야생의 송아지를 제어하고자 암소에게서 떼어내어 한쪽 구석에 커다란 기둥을 박고 거기에 밧줄로 묶으면, 그 송아지가 여기저기 날뛰어도 도망 갈 수가 없고 그 기둥 가까이 앉거나 누울 수 있듯이, 그 수행승은 오랜 시간 형상 등의 대상의 맛에 심취한 사악한 마음을 제어하고자 형상 등의 대상에서 떼어내어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집으로 가게 해서 그곳에서 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으면, 그 마음이 여기저기 날뛰어도 이전에 습관화된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새김의 밧줄을 끊고 도망갈 수가 없고, 그 대상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근본삼매를 통해서 가까이 앉고 누울 수 있게 된다.”(Vism.8.153)


청정도론에서는호흡의 기둥에 새김의 밧줄을 묶는다라고 했다. 호흡은 기둥이고 사띠는 밧줄이라는 것이다.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을 묶어 놓으면 어떻게 될까? 송아지는 밧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 즉 행경(行徑)이라고 한다.

끈이 풀어지면 송아지는 천방지축 날 뛰어다닐 것이다. 마음도 그렇다. 사띠의 끈을 놓쳐 버리면 망상의 집을 짓게 된다. 송아지를 끈으로 기둥에 묶어 두면 송아지는 끈의 반경 내에서 놀 것이다. 마찬가지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배의 기둥에 사띠의 끈으로 마음을 묶어 놓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잡념이 일어나도 쉽게 제압된다. 사띠의 끈 길이만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중에 통증이 있다.

평좌를 하고 요가매트에 앉아 있는다. 30분 정도 지나면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통증이 일어나도 사띠의 끈을 놓고 있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남의 다리처럼 본다.”라고 말한다.

다리에 통증이 왔을 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통증이 심할수록 두려운 마음은 커져 간다. “이러다가 불구 되는 거 아냐?”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한번 패닉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다리를 풀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스승들은 한결같이 통증을 잘 관찰하라고 말한다. 법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사념처에서 수념처(
受念處)를 말한다.

통증은 느낌관찰하기에 최고로 좋다. 그래서 통증이 오면 손님을 맞는 것처럼 대하라고 했다. 통증은 불청객이 아니라 나에게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귀중한 손님과 같다는 것이다.

손님이 왔으면 대접을 해야 한다. 설령 불청객이라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다리에 통증이 생겼다는 것은 법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절호의 찬스가 된다. 그래서 통증이 왔을 때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라고 말한다. 마치 남의 다리 관찰하듯이.

다리저림이 발생했을 때는 남의 다리 보듯 해야 한다. 나의 다리라고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배우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면서 통증을 관찰한다는 것은 마치 송아지를 끈으로 기둥에 묶어 둔 것과 같다.

송아지는 끈의 길이만큼만 움직인다. 사띠가 유지되면 사띠의 끈 길이만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주관이 개입되면 다리통증도 나의 것이 된다. 그래서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 된다. 그리고 불구가 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통증과 아픔과 두려움을 나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유신견이다.

 

유신견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삿된 견해를 말한다. 예를 들어 느낌에 대한 정형구를 보면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통증을 대입하면 그는 통증을 자아로 여기고, 통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통증이 있고, 통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M109)가 될 것이다.

 

다리저림으로 아파도 남의 다리 보듯이 하면 참을 만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병에 걸린 나꿀리삐따 장자에게 그대는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해 주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다리저림으로 인하여 통증이 일어나면 남의 다리 보듯이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나의 다리는 더 이상 나의 다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M109)가 된다. 이 정형구에 통증을 대입하면 그는 통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통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통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통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마음이 현재에 있으면 괴롭지 않다. 마음이 괴로운 것은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0)고 했다. 이렇게 해야 악마에게 정복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악마의 영역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순간에 죽는다면 악처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현재에 있다면 죽음의 신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 어디를 보아도 업형성력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현재에 두면 얼굴이 맑고 깨끗할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불선업을 짓게 되어서 악마의 영역에 있게 되지만, 마음이 현재에 있으면 선업을 짓게 되어 선업공덕이 된다. 마치 물레방아를 돌리는 것과 같다.

물레방아는 현재 물로 돌아간다. 지나간 물이나 아직 오지 않은 물로는 돌릴 수 없다. 오로지 현재의 물만이 커다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다. 마음이 늘 사띠를 유지하면 큰 힘을 낼 수 있다. 마치 현재 물이 물레방아를 돌려 동력원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과 같다.

현재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사띠의 힘에 따른 것이다. 사띠가 강력하면 사띠의 끈도 짧고 굵은 것과 같다. 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을 때 마음이 천방지축 날 뛸 수 없다.

현재의 물만이 물레방아를 굴릴 수 있다. 지나간 과거의 물이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물로는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없다. 현재의 마음만이 선업공덕이 된다. 늘 사띠해야 미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날이 밝았다. 스마트폰을 똑똑 치다보니 아침 6시가 다 되었다. 밖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 번개도 번쩍한다. 비가 오는 모양이다. 무려 3시간 이상 친 것이다. 전혀 피곤하지 않다. 오늘도 하루가 시작된다.


먼지로 덮인 새가
날개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듯.
올바른 새김으로 정진하는
수행승들은 몸에 붙어 있는 먼지를 털어 버리네.”(S9.1)


2021-05-2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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