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수행 초보자에게 한시간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1. 6. 3. 15:17

수행 초보자에게 한시간은


어느 것 하나 가만 있지 않는다. 계속 변한다. 바꾸어 말하면 무상한 것이다. 생활 패턴도 그렇다.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 오년전과 다르고 십년전과도 다르다.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글쓰기이다.

글은 의무적으로 쓰고 있다. 십여년 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매일 쓰고 있다. 요즘은 두 개도 쓰고 세 개도 좋다. 이렇게 틈만 나면 쓴다. 스마트폰 시대라 언제 어디서나 엄지 가는 대로 친다.

요즘 글쓰기 못지 않게 의무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수행이다. 사무실 한켠에 명상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오늘 오전 앉아 있고자 노력했다. 요즘 시간이 철철 남아서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다. 책 읽는 것도 한계가 있다. 유튜브 시청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모두 간접적인 경험이다. 남이 해 놓은 것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눈과 귀로 접하여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힘을 필요로 한다. 30분 이상 집중하면 피곤하다. 무엇보다 허망하다는 것이다. 에너지 소모도 심하다. 망상에 빠진 것처럼 생각의 무게를 느껴 피곤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남이 해 놓은 것을 즐길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콘텐츠라도 직접 경험한 것보다 못하다. 십분 눈 감고 앉아 있는 것 보다 못하다.

눈 감고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 잡념이 일어나긴 하지만 눈으로 유튜브 시청한 것보다 피로도는 훨씬 덜하다. 배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 더 편안해진다.

좌선은 일종의 탈출구와 같다. 눈만 뜨면 어딘가에 시선을 두어야 하지만 일단 앉아 있으면 시각에서 해방된다. 다만 청각이 문제이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등 도시의 각종 소음은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숲으로 들어가라고 했나보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자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앉아 본 사람에게는 몇 시간도 끄덕 없을 것이다. 일종의 수행프로페셔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하는 일을 그들이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자세를 바꾸어 보았다. 요가매트에서 평좌를 했는데 평소와 다르게 왼쪽다리를 바깥으로 했다. 의외로 자리가 잘 잡혔다. 무엇보다 바깥쪽 왼쪽다리가 바닥에 밀착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한 것과 대조된다.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했을 때는 바닥에서 뜨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자세를 바꾸어 왼쪽다리를 바깥으로 하니 바닥에 밀착되어서 안정적 삼각대를 형성하는 것 같았다. 오늘 좌선은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평좌를 하고 눈을 감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세상과 차단된 듯하다. 세상에서 탈출한 듯한 느낌이다. 세상에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켜보면 된다. 그러나 집중이 약하면 잡념이 치고 들어온다.

생각도 못했던 것이 떠 오른다. 한번도 보지도 생각도 못했던 것들이 슬쩍 지나가기도 한다. 이럴 때일수록 배의 움직임을 따라 가야 한다. 배의 움직임, 즉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이것 보다 편한 것이 없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저 지켜보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책 읽는 것보다 유튜브 보는 것보다 열배, 백배 더 낫다. 그러나 수행 초보자이다 보니 집중이 쉽지 않다.

오늘은 한시간 꼭 버텨 보기로 했다. 오늘 오전 두 번 시도했다가 패퇴한 바 있다. 점심시간 전에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요가매트에 방석도 깔지 않고 앉았다. 평소와 다르게 왼쪽 다리를 바깥으로 하여 평좌했다. 이십분 정도까지는 좋았다. 이십분이 지나자 슬슬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바깥쪽으로 한 왼쪽 다리에서 통증이 스멀스멀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리저림이 심화되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느낌관찰하기에 좋다. 사념처 중에서 수념처하기에 통증보다 반가운 것이 없다. 통증의 생성부터 소멸까지 관찰하기 위한 찬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스승들은 한결같이 통증을 귀한 손님 모시듯이 하라고 했다. 법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다리저림으로 인한 통증이 발생될 때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켜보듯이 지켜 보는 것이다. 통증이 심하다고 해서 조치할 것이 없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이 지켜보는 것이다.

다리저림을 나의 통증이라고 보면 견딜 수 없다. 당장 다리를 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몸에 상처 하나만 나도 괴로워한다. 하물며 다리가 끊어 질듯 통증이 왔을 때는 어떠할까? 그러나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야 한다. 이런 것도 자주 해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초짜들은 힘들어 한다.

시간이 갈수록 다리저림은 점차 심해졌다. 처음 앉았을 때 편안함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통증과의 싸움만 남은 것 같았다.

내심 통증이 사라지기를 기대 했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직지사 대웅전에서 통증의 생성과 소멸까지 지켜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개입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결국 항복했다. 통증이 이기는지 지켜보는 내가 이기는지 끝까지 가보려고 했지만 도중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서 다리를 풀었다. 그렇다고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된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hp 60)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이 길듯이, 수행 초보자에게 한시간은 길다. 생업을 가지고 있는 자가 생업과 수행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생업은 프로페셔널이지만 수행은 아마추어이다. 수행도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비록 오전에 패퇴했지만 마음만은 상쾌하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하다. 흙탕물이 가라앉은 것처럼 마음도 정화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걸을 때도 약간 알아차림이 있다. 바깥 풍경도 평소와 다르게 익숙하게 보인다. 어제 분노는 저 멀리 달아난 것 같다.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분노는 표출되기 마련이다. 엉뚱한 사람을 대상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정치인이 타겟이 되기도 한다.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도 타겟이 된다. 분노함으로써 쾌감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는 양면성이 있다. 분노는 쾌감도 있지만 동시에 독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분노는 사디스트적 가학이 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욕 먹은 자를 욕하고, 맞은 자를 때리는 식이다. 분노의 가학성(加虐性)이다. 이념의 노예가 되었을 때도 이런 현상을 보게 된다.

분노는 쾌감을 수반한다. 그런데 분노하면 할수록 독이 분비된다는 사실이다. 분노는 나무꼭지에 있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동시에 분노는 나무뿌리에 있는 독과 같아서 치명적이다.

분노는 어느 경우에서나 파괴적으로 작용한다. 분노함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쾌감을 맛보지만 동시에 독이 분비되어서 그 독으로 죽을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노에 대하여 뿌리엔 독이 있지만, 꼭지에 꿀이 있는 분노”(S1.71)라고 한 것이다.

사람에 대한 불만과 사회에 대한 불만을 분노로서 표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나 분노는 파괴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자신을 파멸로 내몬다. 분노하기 보다 분노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좌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한시간 앉아 있다 보면 분노는 저 멀리 가 있다. 좌선하고 나면 상쾌한 이유가 되는 것 같다.


2021-06-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