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의 진산(鎭山) 수리산 관모봉에서
일요일 정오 전에 집을 나섰다. 오늘은 다리 운동을 하기로 했다. 등산만큼 좋은 것이 없다. 산길을 너댓시간 빡세게 걸으면 최고의 운동이 된다. 비산사거리에서 11-2번 버스를 타고 만안구청 정류소에서 내렸다. 늘 다니는 길이다. 집에서 사무실 갈 때 이렇게 간다.
수리산은 안양의 진산(鎭山)이다. 예로부터 진산은 도읍이나 성시의 뒤에 있는 큰산을 일컫는 말이다. 주산이라고도 한다. 진산은 오늘날 랜드마크와도 같다. 사방 어디서든지 보이기 때문이다. 진산은 일종의 수호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산에서 고을의 안녕을 위해 제사지냈다고 한다.
안양은 서쪽으로는 수리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관악산, 동쪽으로는 청계산, 남쪽으로는 모락산이 있다. 이 중에서 안양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산이 수리산이다. 안양의 진산은 수리산이고, 수리산은 안양을 수호해주는 산이다.
산행은 수리천 약수터에서부터 시작했다. 관모봉까지는 오로지 오르막만 있는 가파른 길이다. 일종의 깔딱고개와 같은 코스이다.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게 쉽게 올라갈 수 있을까?
오로지 정상정복에만 마음 둔다면 마음이 급해진다. 마음이 앞서 가면 산행이 몹시 힘들어 진다. 빨리 가려 하면 할수록 몸도 마음도 피곤해진다. 이럴 때는 발에 집중해야 한다. 어떻게 집중하는가? "이-거-시-머-시-다-냐"하며 집중하는 것이다.
"이거시머시다냐"는 "이뭐꼬?"를 전라도 말로 풀이한 것이다. "이뭐꼬?"는 화두 "시심마(是甚麽)"를 경상도 말로 표현한 것이다. 본래 시심마는 "이것이 무엇인고?"라며 의문하는 것이다. 이를 경상도 말로 "이뭐꼬?"라며 세 글자로 압축했다. 그런데 압축한 "이뭐꼬"를 전라도 말로 "이거시머시다냐"로 다시 펼쳐 놓은 것이다.
"이거시머시다냐"는 일곱글자이다. 산행할 때 한발한발 뗄 때마다 "이거시머시다냐"라며 명칭붙이면 효과적이다. 왼발부터 시작하면 왼쪽발에서 끝난다. 홀수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시 "이거시머시다냐"라며 오른발부터 명칭붙이면 오른발부터 시작해서 오른발에서 끝난다.
"이거시머시다냐"를 반복하면 결국 "왼발, 오른발"이 된다. 자연스럽게 사띠가 되는 것이다. 시심마가 등산에 적용되어 한발, 한발 뗄 때마다 사띠가 되어 등산하는 것이 수행이 된다.
산행할 때 "이거시머시다냐"하면 힘들지 않다. 이는 발에 마음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잡생각이 일어나지 않아서 힘들지 않다. "이거시머시다냐"라며 명칭 붙이면 힘든 것도 잊어버린다.
요즘 게송외우기를 하고 있다. 법구경 찟따왁가 11개 게송이 대상이다. 오늘 산행하면서 "이거시머시다냐"대신에 게송외우기로 했다.
현재 다섯 번째 게송을 외우는 중이다. 앞서 네 개 게송을 외운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자꾸 잊어버린다. 아직 내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행하면서 게송을 암송했다. 모두 다섯 개의 게송을 입으로 계속 되내였다. 막히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게송을 캡쳐 해 놓았기 때문이다. 산행중에 다섯 개의 게송을 계속 반복해서 중얼중얼 외웠다. 입에 익으니 이제 줄줄 나온다. 사진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빠알리 게송을 외울 때 뜻을 알고 외우면 더 좋다. 뜻도 모르고 외우면 "나모라 다나다라"하며 신묘장구대다라니 외우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빠알리어는 생소하다. 한문 게송 외울 때는 한자를 알기 때문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빠알리 단어는 한번도 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빠알리어 상야멧산띠(saṃyamessanti)는 빠알리 사전을 찾아보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는 영어로 'practised self-control'의 뜻이다. 이렇게 빠알리 단어를 외울때 영어를 떠올리며 외워야 한다.
수리천 약수터에서 관모봉까지는 가파른 오르막만 있는 길로 한시간 걸렸다. 게송 다섯 개를 암송하며 올라가다 보니 금새 시간이 지나 간 것 같다. 암송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힘들다는 느낌도 잊어버렸다. 한편으로 게송을 외우고, 또 한편으로 발에 집중하니 자동으로 사띠기 되는 것 같다. "이거시머시다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 같다.
해발 426미터 관모봉 정상에 섰다. 정상에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발 아래에는 안양시가 전개되어 있다. 온통 백색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만 보인다. 대자연 못지 않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도 산 정상에서 보면 아래로 보인다. 성층권 하늘에서 보면 점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위대해도 자연만 못하다. 장대한 건축물이 경탄을 자아 내지만 여명과 노을에서 보는 숭고함만 못하다.
자연은 태고적부터 그대로 있는데 사람사는 곳은 변화무쌍하다. 사오년전 이 자리에 섰을 때 보다 아파트 단지가 더 생겨났다. 지을 땅이 없으면 허물고 다시 짓는다. 과연 언제까지 성장할 것인가? 언제 건설행진은 멈출까? 거대한 아파트 단지를 보면서 인간의 욕망과 욕망이 투영된 경이를 동시에 본다.
저 아래 안양 7동에 예전에 다녔던 회사가 보인다. 그때 90년대 하반기 때 다녔다. 30대 하반기 때이기도 하다. 수리산 관모봉에 서니 그때 회사 다녔을 때 하나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어느 날 공장장 주재로 팀장회의가 열렸다. 공장장은 무선전화기 팀장에게 고사 지냈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해당 팀장은 "어제 자정에 수리산 정상에서 고사지냈습니다."라고 보고 했다. 그때 당시 그 회사에 합류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회사에서는 신제품이 개발되어 출시를 앞두고 있을 때 고사지내는 행사를 했었다. 안양의 진산 수리산에서 개발팀장과 담당자들이 고사지낸 것이다. 이런 행위가 미신일 수도 있지만 물건이 잘 판매되기를 바라는 절박감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도시나 마을이나 뒷산이 있다. 이를 진산이라 하는데 도시나 마을을 수호하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안양의 경우 수리산이 진산임에 틀림없다. 이는 이십여년전 개발팀장과 담당자들이 처음 출시된 제품을 들고 공장이 바라 보이는 수리산 꼭대기에서 고사를 올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그곳이 태극기 휘날리는 관모봉인 것이다.
이번 산행에서는 게송외우기를 시도해 보았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산행이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이거시머시다냐"라며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같다.
산행중에 게송외우기를 하니 일석삼조가 된 것 같다. 운동도 되고, 게송도 외우고, 사띠수행도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산행할 때 게송외우기를 해야겠다.
2021-09-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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