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5세까지를 한계로 정해보지만
유행가중에 좋아 하는 노래가 있다.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멜로디가 좋아서 즐겨 듣기도 하지만 늘 기억에 남는 노래가사가 있다. 그것은 "이렇게 다시 후회할 줄 알았다면 아픈 시련 속에 방황하지 않았을텐데"라는 말이다.
유행가는 사랑의 실연을 노래한 것이다. 노래가사에는 반드시 실연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절절히 담겨있다. 그것은 현재 방황으로 나타난다.
흔히 방황한다고 말한다. 방향을 잡지 못하는 것이 연상된다. 사전적 의미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wandering이다.
유행가는 방황을 노래하고 있다. 실연에 의한 방황이다. 실연이 시련이 되어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방황을 끝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향을 잡아야 할것이다.
나는 삶의 방향이 있을까? 확고한 방향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막연하게 백권의 책을 내겠다든가 게송을 외워 보겠다고 블로그에 천명했지만 약하다. 좀더 큰 목표를 가져야 한다. 이번 생애에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고자 하는 목표같은 것이다.
목표와 목적이 있다. 목표보다 목적이 더 포괄적이다. 예를 들어 변호사를 목적으로 한다면 먼저 로스쿨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의사라면 의사고시가 목표가 될 것이다. 열반을 목적으로 한다면 일단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어디 가서 수행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왜 그런가? 비난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대개 "수행한다는 사람이"라든가, "도닦는다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쉽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이다.
수행은 조용히 해야 한다. 도는 모르게 닦아야 한다. 드러내면 어떤 식으로든지 비난이 된다.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다. 왜 그런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남들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남들 한번도 가지 않는 길을 갈 때 상처투성이가 될 수 있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이 가는 길을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긍하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 반신반의하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크게 웃어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나는 수행한다'든가, '나는 도를 닦는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했다. 도도 숨어서 닦아야 한다. 드러내 놓고 수행한다고 말하면 허물이 낸다. 내가 그런 꼴이 났다. 이렇게 글로서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어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그럴듯한 글을 써도 반응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글이 길어서 패스할 수 있고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아 패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더 큰 목표를 잡았으면 좋겠다. 성자의 흐름에 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세속적 즐거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어야 한다. 먹는 즐거움 마시는 즐거움도 그만 두어야 한다. 청정한 삶을 지향해야 성자가 될 수 있다.
이 언덕에만 머물러야 할까? 왜 저 언덕으로 건너가야 할 엄두를 내지 못할까? 그것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세속적 즐거움이다. 감각에 대한 즐거움이 크다. 한번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불길에 휩싸이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
"사하왓사 닷사나삼빠다야
따얏수 담마 자히따 바완띠
삭까야딧티 위찌낏치딴짜 실랍바땅"
매일 듣는 빠알리 게송이다. 라따나경에 있는 것으로 "통찰을 성취함과 동시에, 개체가 있다는 견해 매사의 의심, 규범과 금계에 집착의 어떤 것이라도,"(Stn.231)라는 뜻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말하고 있다.
성자가 되기 위한 세가지 조건이 있다.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 위찌낏짜(vicikiccha), 실랍바따(sīlabbata)를 말한다. 각각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금취를 말한다. 세가지는 타파되어야 한다. 특히 유신견이 부수어져야 한다. 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몸과 마음이 내것이라고 여기게 되면서 사단이 벌어진다. 그래서 항상 "내가"라고 말한다. 그런 나는 있는 것일까?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연기법으로 증명된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서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서 나는 없는 것이다. 있다면 변화속의 나는 있다. 오늘의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도 있다. 십년전의 나도 있다.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나는 같은 나일까? 십년전의 나는? 사십년 전은? 최근 유튜브에서 무진기행을 보았다. TV문학관에서 방영했던 것으로 1981년에 만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0년전 작품이다.
무진기행에서 박근형이 주연이다. 박근형 얼굴이 익숙하다. 아내역할은 기억이 희미하다. 선우용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자 탤런트들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사십년전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때 그사람이 지금 그사람과 같은 사람일까?
불과 한달전에 페이스북에서는 이십대놀이가 있었다. 이십대 때 사진을 소환하여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이십대 중후반 연수원 사진을 소환했다. 기업연수원 사진을 말한다. 대졸신입사원 연수교육 받을 때 사진을 보니 풋풋해 보였다.
그때 모습과 지금 모습은 다르다. 외모도 다를 뿐만 아니라 생각도 다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딴 사람과 같다. 그럼에도 나의 모습이라고 한다.
과거를 소환하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북에서는 일년전 오늘을 소환하기도 한다. 때로 오년전, 십년전 것도 소환한다. 자신과 일체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까지 한번도 과거를 소환하지 않았다. 페이스북에서 에이아이(A.I)가 알려 주지만 무시한다. 과거보다 현재를 더 중시한다. 현재 올릴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애도하는 사람이 있다. 빛나고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왠지 처량한 느낌이 든다. 과거 사진을 보면 젊은 이미지인 것이 큰 이유이다. 나이가 들어 형편없이 늙어 버렸다면 세월무상, 인생무상을 느낄 것이다.
매일 거울을 본다. 왠 늙은이가 보인다. 머리는 반백에서 올백으로 넘어가려 한다. 오른쪽에는 검버섯이 피어서 흉측하다. 청소년시절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이것이 내얼굴일까?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얼굴에 조금이라도 이물질이 발견되면 큰일 난다. 검버섯이 보이면 어떻게해서든지 제거하려 할 것이다. 얼굴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에 얼굴이 자아이고, 자아가 얼굴인 것이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얼굴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다. 그래서 얼굴을 잘 가꾸고자 한다. 요즘 TV를 보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매끈한 피부를 볼 수 있는데, 이는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은 얼굴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해당된다. 그가 학위가 있다면 "박사님"이라고 불러 준다. 그 사람을 호칭할 때 최고로 높이 올라간 지위를 붙여 준다. 그래서 "장관님" "의원님" "교수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일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명사가 되려면 인터넷인물사전에 등재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명사가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잘된 일인지 모른다. 왜 그런가?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자신과 동일시했을 때 자만에 빠진다. "내가 누군데"라며 우월적 자만에 빠졌을 때 유신견이 된다.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하듯이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려면 먼저 유신견부터 깨야 한다.
많이 살았다. 이런 말하면 연세가 많은 사람들은 가소롭게 생각할 것이다. 인생 육십이 넘었으니 많이 산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부럽기는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그러고보니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청정도론에서 본 인생십년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1) 유아적 십년(0-10세)
여리고 불안정한 아이
2) 유희적 십년(11-20세)
그는 많은 유희를 즐긴다.
3) 미모적 십년(21-30세)
그에게 미모에 대한 관심이 커진다.
4) 체력적 십년(31-40세)
힘과 기력이 크게 생겨난다.
5) 지혜적 십년(41-50세)
그에게 지혜가 잘 확립되는데,
선천적으로 지혜가 부족한 자에게도 이 시기에 지혜가 조금이나마 생긴다.
6) 퇴행적 십년(51-60세)
그에게 유희, 미모, 체력, 지혜가 퇴행한다.
7) 경사적 십년(61-70세)
그에게 신체가 앞으로 기울어진다.
8)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
그에게 신체가 쟁기처럼 굽어버린다.
9) 노망적 십년(81-90세)
그는 몽매하게 되어 하는 것마다 망각한다.
10) 와상적 십년(91-100세)
백세를 먹은 자는 대부분 누워서 지낸다. (Vism.20.51)
십년주기를 보면 오늘날과 맞지 않은 것도 있다. 특히 8번 '타배(駝背)적 십년(71-80세)'이 그렇다. 신체가 낙타 등처럼 굽은 모습이다. 아마 옛날에는 노동으로 인하여, 또는 못먹어서 그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청정도론 인생십년변화를 보면 오늘날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 같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9번 '노망적 십년(81-90세)'이다. 이는 오늘날 치매에 해당된다. 신체기능이 노화되면 치매 걸릴 성이 많다. 옛날에는 이를 노망이라고 했다.
10번 항을 보면 '와상적 십년(91-100세)'이라고 했다. 거의 누워지내는 시기를 말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구십대가 되면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쇠퇴가 와서 죽을 날만 가다리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은 짧다. 언제까지 활동 가능할까? 사람들 대부분 75세까지로 잡는 것 같다. 왜 75세인가? 이는 인생사주기와 관련 있다.
바라문 인생 사주기가 있다. 범행기, 가주기, 임서기, 유행기를 말한다. 여기서 임서기는 손자가 태어났을 때 실행된다. 가업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숲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현대판 인생사주기도 있다. 이를 학습기, 직업기, 봉사기, 노후기로 나눈다. 이에 25년 주기가 적용된다. 이 중에서 클라이막스는 봉사기가 해당된다. 나이로 따지면 50세에서 75세까지를 말한다. 봉사하는 삶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최근 최진석 선생 메일을 받았다. 어떤 인연으로 대량으로 발송되는 메일을 받고 있다. 그의 인생사주기를 유투브에서 들었다. 인생은 너무 짧기 때문에 자신의 일생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고 한다. 20-40세까지는 학습기로 1단계이고, 40-60세까지는 굳히기로 2단계이고, 60-75세까지는 봉사기로 3단계이고, 75세 이상은 죽음준비기로 4단계라고 했다.
최진석 선생은 대학 다닐 때 인생이 매우 짧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최진석 개인의 인생사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단계 굳히기는 교수재직 기간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공부한 것을 더 단단히 하는 시기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65세 정년을 채우지 않고 60 이전에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 좋은 교수자리를 박찬 이유는 무엇일까? 정년과 연금 등 안락한 삶을 거부한 것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본다. 근본적으로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헸다.
최진석 선생은 철학자로서 유튜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플랜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 좋다는 교수직도 박찼다. 그런데 그도 75세를 한계로 잡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서나 75세를 한계로 보는 것 같다.
활동할 수 있는 한계를 75세로 보고 있다.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건강도 좋아지는 추세에 있지만 대체로 75세로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얼마 남지 않았다. 고작 십몇년 남았다. 나는 이 기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참으로 세월이 빨리 흘러 간다. 연초인 것 같았는데 시월의 끝자락에 있다. 나머지 두달도 훌쩍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새해를 맞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세월가다 보면 등이 굽고 노망 들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무언가 해 놓아야 한다. 한살이라도 나이가 젊을 때 이루어 놓아야 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인생 스케줄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오늘 단절될 수 있다. 인생 75세 이전에 끝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다급하다. 해야 할 일을 미룰 수 없다.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해야 한다. 지금 수행해야 한다. 지금 도를 닦아야 한다. 성자의 흐름에는 들어 가야 안심이다. 그래서 머리에 불 난 것처럼 살아야 된다고 했나 보다.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지 말아야 한다. 목표를 가진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75세까지는 봉사하는 삶을 살고 그 이후에는 수행자로서 삶을 사는 것도 좋다. 더 좋은 것은 현재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삶이다. 어떤 것이 있을까? 글쓰기도 그런 것 아닐까?
"사람의 목숨은 짧다.
훌륭한 사람이라면 그 목숨을 경시하라.
머리에 불이 붙은 듯 살아야 하리.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S4.9)
2021-10-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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