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경전 보기를 방석보듯 하는 전직 승려

담마다사 이병욱 2021. 12. 26. 09:22

경전 보기를 방석보듯 하는 전직 승려


어느 전직 스님이 글을 올렸다. 자신이 스님이었을 때 이야기를 에스엔에스에 쓴 것이다. 경전에 대한 것이다. 어느날 작업을 하는데 경전을 깔고 앉았다는 것이다.

그는 경전에 대하여 단지 책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뗏목의 비유를 말했다. 신심있는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뗏목의 비유를 말한다.

뗏목은 강을 건넜으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불살라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에서는 불살라 버려도 된다고 말한다. 전에 스님이었던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다. 땔감이 없으면 연료로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선불교는 호방한 것 같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가 되면 아버지도 죽일 수가 있고 어머니도 죽일 수 있다. 물론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을 것이다. 하물며 언어로 되어 있는 경전은 어떠할까? 불상도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오늘 새벽에도 십이연기분석경을 암송했다. "에왕 메 수땅"에서 부터 "니로도 호띠띠"까지 십여분 걸린다. 의미를 알고 암송한다. 뜻을 하나하나 새기며 외운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 절정이 있다. 금강경에서는 대승정종분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초입에 있다. 그러나 초기경전에서는 말미에 있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 절정은 아마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가 될 것이다.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뜻이다. 십이연기가 회전하면 괴로움의 다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알아차림 없이 살면 괴로움이 다발로 발생한다. 최악은 절망(upayasa)이 될 것이다. , , 치로 살면 누구나 절망에 이르게 되어 있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절망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희망의 종교이다. 비록 무명에 덮이어 이모양 이꼴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행위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느낌(vedhana)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그뿐이다.

느낌은 즐겁거나 괴로운 것이다. 무덤덤한 것도 있다. 즐거우면 즐거운 줄 알고, 괴로우면 괴로운 줄 아는 것이다. 무덤덤한 느낌도 알아차릴 대상이다. 이렇게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연기가 회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괴로움의 다발도 일어나지 않는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 이는 불사가 됨을 말한다. 불사가 되면 태어남도 없다. 불생불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느낌단계는 윤회의 탈출구가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심오하다. 심오한 부처님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왔다. 그리고 문자로 전승되어 왔다. 이렇게 본다면 경전은 부처님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경전을 통해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는다. 나에게는 경전이 불상과 같다.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은 부처님 그 자체와도 같다. 그럼에도 어느 전직 승려는 경전에 쓰여 있는 문자를 하찮게 여긴다. 문자는 문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ㅜ 쯤으로 보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문자를 무시한다. 다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문자에 갇혀 있으면 달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경전을 방석으로 사용하고 심지어 땔감 정도로 보는 것 같다.

경전을 소중히 여긴다. 경전은 부처님과도 같다. 경전을 열면 부처님이 현전하는 것과 같다. 그런 부처님 가르침은 진리의 말씀이다. 결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될 수 없다. 경전은 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십이연기분석경을 암송할 것이다. 다음에는 빠다나경(정진의 경)’(Sn3.2)을 외울 예정이다.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부처님 그 분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씀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경전 보기를 방석보듯 하는 전직 승려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


2021-12-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