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내가 회의론자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2. 3. 15:30

내가 회의론자에게 답하지 않는 이유


토론을 하지 않는다. 토론할 줄 모르는 것이 큰 이유이다. 토론을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댓글에 답을 하지 않는 것도 토론에 자신 없기 때문이다.

블로그에서 종종 댓글을 받는다. 페이스북 댓글과 달리 블로그 댓글은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가 된다. 페이스북의 경우 친구 관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블로그 댓글은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블로그 댓글에 답글을 달지 않는다. 짤막한 문의에 짤막하게 답변은 하지만 긴 도발성 댓글에는 답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 큰 이유이다. 자신을 밝히는 경우라면 예외일 것이다. 더구나 예까지 갖춘다면 답글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넌지시 떠 보려는 질문에도 침묵했다. 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이런 것이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는 식의 질문을 말한다. 이런 물음에는 답을 해서는 안된다. 자아론에 입각한 자가 넌지시 떠보기 위해서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질문같지 않은 질문, 질문으로서 성립이 되지 않는 질문에 답을 하면 말려 들어간다. 어떤 말을 해도 말꼬리를 잡으려고 할 것이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는 무기 했다. "세상은 영원한가?"라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은가?" 등에 대한 질문을 말한다. 이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 설령 답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다.

부처님은 왜 형이싱학적 질문에 무기했을까? 그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에 기반한 질문을 했을 때 답을 하면 희론이 된다. 희론적 질문에 희론적 대답을 하게 되는 셈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잘못된 질문에 답을 하면 잘못된 답이 된다. 우문에 우답이 된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잘못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그대신 연기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로 시작되는 연기송에 기반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질문같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방을 떠보기 위한 오물장 같은 질문에는 더욱더 침묵했다. 그러나 몰라서 묻는 질문이나 배우려는 자세로 예를 갖춘 질문에는 예외였다. 그런 경우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해 주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한 것이다. 연기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존재론에 기반한 질문을 한 것이다.

부처님은 "누가"라고 질문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라는 질문은 우문이 된다. 존재론에 기반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질문에 대하여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입니다."라고 답하면 영원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다."라고 답하면 허무주의자가 되어 버린다. "괴로움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면 회의론자가 되어 버린다.

존재론적 질문에 사구로 답하면 모두 우답이 되어 버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질문이 잘못되었지만 배우려는 자세가 있고 더구나 예를 갖추었다면 부처님은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십이연기 유전문과 환멸문을 들려준 것이다. 먼저 연기법 부터 알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누가"가 아니라 "어떻게"로 시작되는 질문을 하라고 했다. 이는 "누가"로 시작되는 질문은 존재론에 대한 것이고, "어떻게"로 시작되는 질문은 연기법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블로그 댓글에 답을 달지 않는다. 첫째, 태도를 문제 삼는다. 먼저 자신을 밝혀야 할 것이다. 자신을 꽁꽁 숨겨 놓고 질문했을 때 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결론을 내 놓고 넌지시 떠보기 위한 질문으로 보이면 답을 하지 않는다. 배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꼬투리를 잡으려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셋째, 가르침에 대해서 회의하는 질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을 리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시비를 거는 것이다. 경전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시비를 걸기 위한 질문에는 답을 해서는 안된다.

유튜브를 보면 자칭타칭 깨달은 자들이 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대부분 '존재론'에 대한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다 보니 '제일원인'을 만났다는 식이다. 더구나 모든 종교의 진리는 같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진리는 하나인데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처, 하느님, 참나 등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주장에 연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 아는 방법이 있다. 그가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연기법적으로 말한다면 깨달았거나 깨달음으로 향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가르침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개 니까야, 초기경전을 의심한다.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라며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심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대지 못한다. 자신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때로 학자의 논문을 근거로 삼기도 하지만 불교전통이 다른 학자의 것일 수 있다.

의심을 하면 밑도 끝도 없게 된다. 마치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걸린 자와 같이 된다. 가르침에 대해서 의심하게 됐을 때 자연스럽게 부처님과 상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자신의 법문집에서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말했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의심이다.
둘째,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 승가에 대한 의심이다.
넷째, 수행에 대한 의심이다.
다섯째, 과거에 대한 의심이다.
여섯째, 미래에 대한 의심이다.
일곱째, 과거와 미래 모두에 대한 의심이다.
여덟째,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결국 가르침에 대한 의심이다. 이는 연기법에 대한 의심으로 귀결된다. 그래서일까 회의론자들은 연기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존재론과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니까야와 같은 초기경전을 의심하는 자들은 가르침을 의심하는 것이 되기 쉽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불교의 존립기반과도 같은 연기법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존재론에 천착하다 보면 연기법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가? 존재론은 연기법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은 연기법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조건발생하여 멸함에도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는 것은 제일의 원인을 인정하는것과 같다. 이를 본래불, 불성, 진아, 참나, 진리, 심지어 브라흐마나 하나님으로 부르기도 한다.

나는 누구일까?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망상이다. 내가 누구인지 존재의 근원을 탐구해 보지만 그런 나는 없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것이 니까야, 초기경전이다. 그럼에도 경전을 의심한다면 삼보를 의심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을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삼보를 부정하면 불자가 될 수 없다. 법회 때 삼귀의 할 자격도 없다.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마음이 황폐화 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황무지가 있다. 스승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과 배움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 그리고 동료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황무지 중에서 가르침에 대한 의심은 어떤 것일까? 이는 부처님의 교학과 통찰지에 대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1)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재하는가? 2) 위빠사나를 통해 도와 과를 증득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있는가?"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의심하는 자의 마음은 마음이 황폐한 자와 같다. 황무지에 차가운 바람만 이는 것과 같다. 가르침에 의지 하지 못하면 어디에 의지할까? 아마 존재의 근원에 의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있을 수 없다. 망념만 붙들고 있는 것이다. 가르침을 의심하는 자들에게서 마음의 황무지를 본다.

2022-02-0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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