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죽음이 두려운 것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17. 08:48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이란 무엇일까? 한번도 죽어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죽은 사람, 죽어 나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죽음은 항상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기가 죽기보다 더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밤에 잠을 자면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않았으면라며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흔히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 벽이 하나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문 이쪽은 삶이고 문 저쪽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면 삶과 죽음은 하나일 것이다. 이를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한다. 놀랍게도 생사일여에 대한 게송을 발견했다. 생사일여가 선가의 말 인줄 알았으나 자타카에도 있었던 것이다.

 

자타카는 부처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고 죽는 것이 일상이 된 것 같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다만 서원을 세워 놓은 것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될 때까지 사아승지겁하고도 십만겁 동안 생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자타카 513번째 이야기는 자얏다싸의 전생이야기(Jayaddisajātakaṃ)에 대한 것이다. 보살이 왕자로 살았을 때이다. 이야기를 보면 야차가 등장한다. 보살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야차를 만나러 갔을 때 야차는 왕자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뭇삶은 없는데, 그대는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Jat.513)라며 물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는 야차의 말로 알 수 있다. 중생들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살은 달랐다. 보살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자신이 지은

악업이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나는 삶과 죽음을 헤아리고 있다.

내게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일여하다.”(Jat.513)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악업을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군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해서 악업을 많이 지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왜 그런가? 악처에 태어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 모두를 속여도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다. 설령 그가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의 마음속에서는 남아 있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을 보면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에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고 했다. 이를 원초적 죄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죄의식이 있다. 죄를 지은 자에게 죄의식이 남아 있는 한 그의 마음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게 되어 있다. 이를 경에서는 산 그림자의 비유로 설명되어 있다. 어떤 것인가? 부처님이 이를 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M12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길을 가는 나그네가 있다. 길을 가다가 저녁이 되었다. 석양에 해가 지려 하고 있다. 커다란 산봉우리에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 갈 길 먼 나그네는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죄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임종을 앞둔 자가 있다. 그는 지나간 세월을 돌아본다. 그는 인생을 막 살았다. 막행막식으로 산 결과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밥 먹듯 하고 그러다 보니 오계를 어기는 삶을 되어 큰 범죄도 저질렀다.

 

범죄자는 설령 범죄사실이 발각되지 않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늘 남아 있다. 경에 있는 표현을 빌자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참으로 나는 착한 일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건전한 일을 하지 않았다. 두려움에서 나를 수호하지 않았다. 참으로 나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참으로 나는 불건전한 일을 했다.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악을 짓고 포악하고 죄과를 지은 자들의 운명, 그 운명으로 수명이 다하면 떨어질 것이다.”(M129)

 

 

임종을 앞둔 자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악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세상의 흐름대로 살다 보니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많이 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탐, , 치로 사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며 사는 것도 해당된다. 눈이나 귀 등으로 오욕락을 즐기다 보면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도 하게 된다.

 

욕심내고 성내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는 십악행에서 살생이나 도둑질과 동급으로 보는 것이다. 십악행을 저지르면 악처에 떨어진다고 경전에서는 수없이 강조되어 있다.

 

알면서 짓는 죄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겁다고 말한다. 욕심내고 성내는 것이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가르침에 따르면 중죄가 된다. 이는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명이 대죄라고 말한다.

 

부처가 되기로 서원한 보살은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할 수 없다. 무려 사아승지겁하고도 십만겁동안 보살행을 닦는 동안 나고 죽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데 죽음은 두렵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보살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자신이 지은 악업이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Jat.513)라고 했다.

 

보살은 악업이 없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떤 생을 살아도 악업을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고 죽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일여하다.”(Jat.513) 라고 한 것이다. 이를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생사일여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yatheva me idha tathā parattha.” 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parattha’‘elsewhere, hereafter, in the Beyond, in the other world’의 뜻이다. 그래서 “idha tathā paratha”라는 구절은 여기 저기 어디에서도라는 뜻이 된다.

 

생사일여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삶과 죽음을 헤아리고 있다. (Sakhātajātīmaraohamasmi)”라고 했는데, 이는 생사가 나에게 조건지어져서 이곳 저곳에 태어남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보살은 사람뿐만 아니라 천신이나 축생으로도 태어난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는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에 야차를 찾아간 보살은 이렇게 말했다.

 

 

큰 힘을 지닌 자여, 나를 잡아먹어라.

이제 이 몸에 대하여 장례를 치루어라.

나무의 꼭대기에서 내가 떨어지리니,

원한다면 나의 고기를 먹을 수 있다.”(Jat.513)

 

 

보살은 기꺼이 아차의 먹이가 되겠다고 했다. 이는 죽음을 조금도 두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먹이가 되겠다고 했다. 이는 초월의 길을 가지 않는 자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보살은 자신의 몸을 던지려 하고 있다. 이는 십바라밀에서 승의적 바라밀에 해당된다. 보시바라밀을 예로 든다면 예를 들어 아내들, 아이들, 재물들을 기부하는 것은 일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손이나 발 등의 장기를 기증하는 것은 우월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고, 목숨을 보시하는 것은 승의적 초월의 길의 보시이다.(Jat.I.73)라고 설명된다. 보살이 기꺼이 한목숨을 던지는 이유가 된다.

 

바라밀에는 일반적 바라밀, 우월적 바라밀, 승의적 바라밀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수승한 것은 승의적 바라밀이다.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리는 일반적 바라밀보다도, 자신의 신체 일부를 버리는 것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것이다.

 

보살은 승의적 초월의 길(dasaparamatthapāramī)을 간 사람이다. 언제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떤 존재로 태어나든지 서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기꺼이 한몸 던질 수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보살은 생사가 하나가 된 것이다. 이를 생사일여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2022-03-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