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머리맡 경전으로 맛지마니까야를

담마다사 이병욱 2022. 3. 23. 15:33

머리맡 경전으로 맛지마니까야를


오늘 오전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경전읽기를 해 보자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최근 자타카 교정작업과 관련 있다.

자타카 교정보면서 자타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그것도 각주까지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하나라도 오류가 있는 채로 인쇄된다면 나중에 몹시도 쓰릴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게 문자를 받았다. 월요일 택배로 발송한 교정본 3권과 4권을 잘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교정본 1권과 2권 수정 작업이 딱 완료된 시점에서 3권과 4권이 도착됐기 때문에 타이밍이 잘 맞았다며 감사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자타카 교정본 1권과 2권은 2주만에 다 보았다. 3권과 4권도 2주만에 다 보았다. 2단 칼럼에 2천페이지가량되는 방대한 자타카를 한달만에 다 본 것이다.

목표 날자를 정해 놓고 보았기 때문에 추동력이 있었다. 그것도 밤낮으로 보았다. 물론 일감이 있으면 일을 처리했다. 글도 쓰고 게송을 암기하는 등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완독한 것이다.

교정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니까야 공부모임으로 전재성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 테라가타, 테리가타, 앙굿따라니까야 합본, 청정도론, 율장 부기 교정을 보았다. 이번 자타카 교정으로 모두 여섯 번 교정을 보게 되었다.

교정을 보게 되면 머리말에 이름이 실리게 되는 영예가 뒤따르게 된다. 부처님의 금구성언이 실린 경전 머리말에 이름이 실린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가문의 영광'으로 본다.

현재 빠알리니까야 경전을 모두 갖추었다. 디가니까야, 상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와 같은 4부 니까야를 포함하여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테라가타, 테리가타 등 소부경전도 번역된 것이라면 모두 갖추어 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율장도 갖추었다. 율장 대품, 소품, 비구계, 비구니계, 부기를 말한다. 이밖에도 청정도론과 같은 논장도 갖추었다.

빠알리 삼장의 경우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에서 출간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었다. 초기불연구원에서 번역된 4부 니까야도 갖추었다. 이렇게 갖추다 보니 책장으로 가득하다. 사무실 의자 뒤에 있어서 의자만 회전시키면 일어서지 않고 꺼내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아직 4부 니까야를 다 읽어 보지 못했다. 구입한지 10년가량 되었음에도 다 못 본 것이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교정 작업에 참여했다면 완독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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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니까야를 완독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주 열어 보았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경을 열어 본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랑 형광메모리 칠로 가득하다. 또한 포스트잇 붙여 놓은 것이 많다. 필요할 때 마다 자주 열어 보아서일까 맛지마니까야와 상윳따니까야 1권은 너덜너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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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니까야를 산지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에 개정이 이루어졌다. 오류가 발견된 것을 수정하여 개정판을 내 놓은 것이다. 두 세 달 전 전재성 선생이 최신 개정판 맛지마니까야와 법구경 등 몇 권의 경전을 보내 주었다. 이로 인하여 현재 모두 최신 개정판을 갖게 되었다.

오류는 종종 발견된다. 오자나 탈자도 있지만 아주 사소한 것도 있다. 최근 발견한 것은 소괄호를 안 닫은 것이었다. 이런 오류가 발견되면 문자로 즉각 알려 준다.

개정판이 거듭될수록 완성도는 높아진다. 고전이 읽히는 것은 수많은 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방대한 경전은 어떠할까?

경전을 구입할 때는 최신판을 사야 한다. 초판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교정을 철저히 했다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경이 열악하다면 오류로 나타난다.

여러 교정자가 있다. 안면 있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다. 교정자 중에는 스님도 있다. 모두 KPTS의 후원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니까야 본 지 10년이 넘었다. 10년 동안 니까야를 보고 글을 썼다. 그것도 매일 쓰다시피 했다. 그리고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두 종류의 사부니까야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역 비교를 하게 되었다.

현재 한국불교에서는 초기불전연구원(초불연)의 번역서를 더 많이 인용하는 것 같다. 특히 스님이 인용하는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 그런 것 같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일창스님은 KPTS 번역서를 선호하는 것 같다.

스님들이 초불연 것을 주로 인용해서일까 재가불자들도 따라가는 것 같다. 경을 소개할 때나 인용할 때 초불연 것이 많다. 과연 초불연 번역은 KPTS보다 나은 것일까?

길고 짧은 것은 대보면 안다. 두 종류의 번역서를 원문과 한께 대조해 보면 드러난다. 특히 게송번역에서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초불연 것을 선호하는 것은 무엇일까?

초불연 번역서는 스님이 번역했다. KPTS 번역서는 재가자가 번역했다. 이 차이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아무래도 스님이 번역한 것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번역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스님이 번역했다고 하여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 스님은 수행을 하기 때문에 스님이 번역한 것을 더 높게 처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심장은 수행에 대한 가르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데 요청되는 갖가지 가르침이 있다.

재가번역자라고 해서 지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행의 깊이는 대화를 나누어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번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다.

빠알리삼장 번역자라면 빠알리어를 알아야 한다. 문법, 음운 등 빠알리어에 통달해야 한다. 당연히 영어도 잘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기본이다.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놀랍게도 전재성 선생은 7개 국어에 능통하다. 빠알리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티벳어, 그리고 독일어를 말한다. 물론 텍스트로 가능하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독일어의 경우 읽고 쓰고 말하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독일에서 공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일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문헌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라고 한다. 빠알리 니까야의 경우 이미 1900년대 초에 번역되었다. 우리나라 보다 100년 빠르다. 그래서 독일어로 된 주석서도 많다. 전재성 선생은 7개 국어 독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7개 국어로 된 텍스트를 일일이 대조하고 비교하여 번역한다고 했다.

KPTS
번역은 물 흐르듯이 매끄럽다. 특히 게송 번역을 보면 문학작품을 보는 것 같다. 이는 번역자의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 결합되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데 타 번역서와 차별화된 것이 종종 눈에 띈다.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했고, 브라흐마(Brahma)에 대하여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는 초불연에서 "비구들이여" "범천"이라고 번역된 것과 비교된다.

스님들은 왜 초불연 번역을 선호할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같은 스님이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또한 빅카웨에 대하여 "비구들이여"라고 번역한 것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초불연 번역은 사부니까야 만 있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 등의 소부경전과 율장 번역서는 현재 KPTS에만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것을 보는 사람들은 KPTS것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맛지마니까야와 최신 개정판을 집에 가져다 놓았다. 집에서 읽기 위한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맛지마니까야를 너덜너덜 할 정도로 봤지만 다 본 것은 아니다.

맛지마니까야를 시작으로 하여 사부니까야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고자 한다. 마치 교정작업 하듯이 보는 것이다. 노랑형광메모리로 중요 부위는 칠하고 새기고 싶은 것은 카메라로 찍어 별도로 보관하고자 한다.

 


맛지마니까야 읽기를 하게 된 동기는 최근 자타카 교정작업 영향이 크다. 집과 사무실에서 밤낮으로 보았는데 이런 기세를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목표가 있어야 한다. 맛지마니까야를 보니 1,600페이지에 달한다. 모두 152개의 경으로 이루어진 중간 길이의 경전이다. 하루에 4-5페이지가량 읽으면 1년 걸릴 것 같다.

 


경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는 여러차례 교정 작업을 해 보아서 알고 있다. 읽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읽다 보면 마음이 충만되는데 이는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읽는 경전은 머리맡에 두고 읽을 것이다. 돋보기 안경과 노랑형광메모리펜은 필수 도구이다. 잠자기 전에 머리맡에 놓인 경전을 읽고 자면 잠도 잘 오고 좋은 꿈도 꾸지 않을까?

어떤 일을 하든지 결심해야 한다. 게송 외우기도 결심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경전읽기도 결심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이러한 방법으로 언제까지 읽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결정바라밀에 해당되는 것인지 모른다.

나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일상이다. 밥먹는 것과 같다. 요즘 일상이 하나 더 생겼다. 그것은 게송 외우기를 말한다. 하나의 경을 선정하여 이틀에 한번 새로운 게송을 외우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니까야 경전 읽기이다.

경전읽기는 사무실과 집에서 시행하고자 한다. 일과시간에는 사무실에서 경전을 읽고 집에서는 잠 잘 때 머리맡에 있는 경전을 읽는 것이다. 머리맡 경전으로 맛지마니까야를 선정했다.

 


앞으로 세 가지 일상은 계속될 것 같다. 글쓰기와 암송하기 그리고 경전읽기를 말한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하고자 한다. 이중에 가장 힘든 것은 암송하는 것이다.

쓰는 것은 오래 전부터 해왔다. 밥 먹는 것과 같은 일상이다. 그러나 암송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한다. 왜 그런가? 게송을 외우고 경을 암송하는 것은 수행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마타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쓰기와 외우기 그리고 읽기 중에 가장 쉬운 것은 읽는 것이다. 이럴경우 "읽기가 제일 쉬웠어요"가 될 것 같다. 이번기회에 4부니까야를 모두 완독하고자 한다. 그 첫번째 대상은 맛지마니까야이다. 잠 잘 때 머리맡에 두고 읽고자 한다.


2022-03-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