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16. 17:07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고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이 왔다. 수희찬탄하는 글이 많다. 빠다나경 외우기에 대한 것이다. 수희찬탄하면 공덕은 그사람 것이 될 것이다.

공덕쌓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말 한마디만 거들어도 공덕이 된다. 상대방의 성과에 대해 칭찬하는 것 만으로도 상대방의 공덕이 내것이 되는 것이다. 공감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희찬탄을 뜻하는 무디따(mudita)는 사무량심 중의 하나이다. 기쁨이라고 번역된다. 상대의 성공과 번영을 나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아름다운 마음이다. 그래서 자애, 연민, 기쁨, 펑정의 사무량심을 닦으면 크나큰 공덕이 된다고 말한다.

번역불사에 대한 글을 올렸다. 어느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연등 달듯이 보시하겠다는 글을 남겼다. 평소 보시를 즐겨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희유한 케이스에 해당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하고 보시에도 인색하다. 왜 그런 것일까?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대가를 바라는 뇌물이 아닌 선물임에도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 받을 줄 모르면 줄 줄도 모르기 쉽다. 사랑도 받아 본 자가 사랑을 줄 줄도 아는 이치와 같은 것 아닐까?

남에게 폐 끼치 않고 사는 것은 소극적 공리주의에 해당된다. 나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 또한 "착하게 살면 된다."라는 마음도 해당될 것이다. 이와 같은 소극적 공리주의는 이기주의가 되기 쉽다.

적극적 공리주의가 요청된다. 이를 이타주의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가장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공감일 것이다. 페이스북에서 공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엄지척의 '좋아요', 하트모양의 '최고에요', 안아주는 모양의 '힘내요' 등이 있다.

단지 누르기만 하면 된다. 터치만 해도 공감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사무량심 중의 하나인 무디따, 즉 함께 기뻐함이다. 이것도 일종의 적극적 공리주의에 해당된다. 하물며 글을 남기는 것은 비교할 수 없는 큰 공덕이 된다. 보시를 실천한다면 더욱더 크나큰 공덕이 될 것이다.

보시를 즐겨하는 동기가 있다. 수계동기를 말한다. 동기의 보시행이 밴드에서 목격되었다. 승가에 꽤 큰 보시를 했다. 부자가 보기에는 작을지 모르지만 동기 입장에서 큰 것이라고 생각한다.

"
적으면서 사람들은 보시를 행하고,
많이 가졌으면서도 보시를 원하지 않는다.
적게 가진 자들이 보시한 시물은
천 배가 동일한 것으로 평가된다.” (Jat450)

자타카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가난한 자의 보시는 부자의 보시보다 공덕이 더 큼을 말한다. 월 백만원을 버는 자가 십만원을 보시한 것은 월 천만원을 버는 자가 백만원을 보시한 것과 공덕에서는 같은 것이다. 월 일억을 버는 자가 백만원 보시한 것보다는 열 배 공덕이 많을 것이다.

수계동기는 부유하지 않다. 직장 다니며 혼자 산다. 어린이를 돌보는 직장이기 때문에 수입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때가 되면 큰 보시를 한다. 수입에 비해 과도해 보인다.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종종 재정을 공개하는 선원에서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어느 절의 밴드에서 보았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보시에는 인색한 것 같다. 공감하는 능력도 부족할 것이다. 이런 사람 입장에서 보았을 때 남에게 대가 없이 주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바보는 주고 현자는 받는다.( b
āla denti, paṇḍita gahanti)”(Srp.II.339)

이 말을 니까야 각주에 있는 주석에서 보았다. 이 말의 출처는 자타카에 있다. 업보를 믿지 않는 외도가 한 말이다. 보시는 바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주의자들은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은 허황된 망설이다."(S24.5)라고 말했다.

보시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것일까? 반대로 현명한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을 속여서 먹고 사는 것일까? 대부분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현명한 자는 보시하고 어리석은 자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
간탐한 것과 방일한 것 때문에
이처럼 보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공덕을 원하는 현자만이
실로 보시를 행하는 것이다.”(Jat450)

보시는 대가없이 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도 주고 심지어 자신의 신체 일부도 준다. 더 나아가 목숨까지 준다. 어떻게 이런 행위가 가능할까? 그것은 공덕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시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공덕이 되는 행위라면 결국 보시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보시하고 어리석은 자는 인색하게 산다.

인색한 자는 두려워 주지 않는다.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손해이다.
굶주림과 그리고 목마름이야말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그 어리석은 자가 겪는 것이다.” (Jat450)

업과 업보를 믿지 않는 허무주의자들은 보시는 어리석은 자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하고 현자는 취한다."라고 한다. 삿된 견해를 가진 자들의 말에 따라 한평생 인색하게 살았을 때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 세상에서도 배고프고 저 세상에서도 배고프게 살 것이다.

그가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베풀지 않는다면 자신에게조차 인색할 것이다. 그래서 늘 굶주린 아귀와 같다. 그래서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손해이다."라고 했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넘어야 한다. 우선 공감능력부터 길러야 한다. 상대방의 성공과 번영에 시기하고 질투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일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수희찬탄 하는 것이다. 보시한 사람에게 "사두!"라고 하면 힘 안들이고 내것이 된다. 공덕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올린 글에 자극받아 연등 하나 달듯이 번역불사에 동참하겠다는 페친을 보았다. 수계동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큰 보시를 했다. 보시바라밀을 실천한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받을 줄도 모르고 줄 줄도 모르지만 현명한 자는 받을 줄도 알고 줄 줄도 안다.


2022-04-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