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물질문명은 정신문명보다 우월한가?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24. 07:12
물질문명은 정신문명보다 우월한가?

어제 글을 하나 올렸다. 고와 고소멸에 대한 글이다. 언제나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를 하기 때문에 개인적 견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글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어떤 페친이 댓글을 달았다. 학식도 있고 지위도 있는 분이다. 이런 글이다.

"2500여년 전 부처님께서 비행기 타 보셨을까요?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둥근 지구를 알았을까요?
부처도 예수도 마호메트도 다 같은 한계를 지녔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K님)

이 글은 K님의 견해라고 본다. 개인이 생각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답글을 달았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다르다고 봅니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무상, 고, 무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신문명은 부처님 당시에 이미 완성됐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유물론이 있었습니다.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싸깜발린이 대표적입니다.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아서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 입니다.

유물론은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과학적 유물론이 대표적입니다.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 즉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은 과학적 유물론의 범주에 해당 됩니다. 이와 같은 과학적 유뮬론 역시 단멸론 입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행복하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살다 가자고 말합니다. 이것이 단멸론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학적 유물론은 정신을 탐구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서 무종교 주의 입니다. 리차드 도킨슨이 대표적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물질에 대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질은 흩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유물론은 결국 허무주의 입니다."(이병욱)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은 다른 것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K님은 "예수만이 옳다는 것도, 부처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오류지요."라고 답글을 달았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K님의 글에 대한 답글을 하기에 설명이 길어진다. 블로그에서 검색하여 과거에 써 놓은, 답변이 될 것 같은 글을 발견 했다. K님의 의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글로 답변을 대신하려 한다.

(K님 의문에 대한 답변)

무신론자들이 있다. ‘리차드 도킨슨’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과학적 사실을 들어서 무신론을 주장하지만 엄밀히 따져 보면 ‘단멸론’에 가깝다. 내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귀로 들은 것만 믿겠다는 발상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내생이니 윤회이니 하는 것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당연히 지옥도 없고 천국도 없다. 단지 지금 살아 있을 때 감각을 믿는 것이다.

무신론자들도 꿈을 꿀 것이다. 물질을 탐구하는 과학자들도 꿈을 꿀 것이다. 그들은 무의식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까? 한번도 본적도 없고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자신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전개 되는 사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일까? 만일 정신적 현상을 애써 무시한다면 유물론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과학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을 탐구한다는 것은 물질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내생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는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는 말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한말이다. 자신의 감각으로 인식한 것 이외 것을 인식한다면 망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를 ‘헛소리’라고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도 해당될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A4.77)이 있다. 일반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라고 했다. 네 가지가 있다. 부처의 경계, 선정의 경계, 행위의 과보, 세상에 대한 사변에 대한 것이다. 먼저 부처의 경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부처님들의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

부처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부처가 되지 않으면 부처의 경지를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의 지혜와 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처가 되지 않는 한 그 경지를 알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부처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라며 알고자 한다면 미쳐버리거나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선정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선정의 경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정자들의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선정의 경지에 들지 못하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선정의 경계는 곧바른 앎을 통한 선정의 경계를 말한다.”(Mrp.III.109)라고 했다. 여기서 곧바른 앎(abhiñña)은 신통에 대한 것이다. 네 번째 선정 단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숙명통, 천안통 등 육신통으로 설명되어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초월적인 내용이 많다. 그 중에는 신통에 대한 것도 있다. 이와 같은 초월적 내용이나 신통을 보고서 초기경전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후대에 편집했거나 허위로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월적 이야기나 신통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빼 버리고 오로지 수행과 관련된 것만 믿는 사람들도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회의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신통에 대한 것이다. 어떤 이는 “신통을 보여주어 봐, 그러면 믿을 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 외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것이다. 또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통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통에 회의하는 사람들은 선정의 경지에 회의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신통이 거짓이라고 말한다면 구업을 짓게 된다. 신통에 대하여 회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선정수행을 해서 네 번째 선정단계에서 체험해 보십시오.”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체험하지 않고 자신의 깜냥(感量)으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믿을 수 없게 된다. 설령 부처님의 말씀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후대 이런 일을 예상해서일까 부처님은 “선정의 경계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말한 것 같다.

세번째는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다. 불교인들은 업과 업보를 믿고 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름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업이 언제 익을지 알 수 없다. 언제 업보를 받을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무지한 자들은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간주하여 업보를 면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업보는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이 받는 것이다. 그런 업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세상의 사변’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사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누가 달과 해를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말한다. 마치 “세상은 유한한가?”등의 열 가지 세속철학을 말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문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사변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경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과 같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부처의 경지, 선정의 경지, 업의 과보, 세상의 사변에 대하여 말한다. 모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면 어떻게 될까? 이를 ‘망상’이라고 한다. 말로 하면 ‘헛소리’가 된다. 그 경지에 올라선 자만이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했다.

깨달은 자는 범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범부는 깨달은 자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이는 청정도론 “그러나 거룩한 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안다. 다른 자도 위에 있는 자는 아래에 있는 자의 마음을 안다.”(Vism.13.110)라는 말에 근거한다. 그래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초기경전에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여 내친다면 대단히 경솔한 것이다. 그 경지에 올라서지 않는 한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진리, 뭇삶, 결생, 조건의 유형의 네 가지 사실은 보기도 어렵고 설하기도 극히 어렵다.”(Vism.17.25)라고 했다.

함부로 설할 수 없는 것이 네 가지 있다고 했다. 진리(sacca), 뭇삶(satta), 결생(paṭisandhi), 조건(paccaya)를 말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은 매우 심오하다고 했다. 그래서 성전을 통달한자가 아니면 설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또는 경지에 올라선 자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깜냥으로 부정하거나 회의한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같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깜냥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말하면 어떤 소리를 들을까? 아마 헛소리가 될 것이다. 자신의 인식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말한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미친 자의 넋두리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을 것이다.

2022-04-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