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열반

담마다사 이병욱 2022. 4. 30. 11:13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이 열반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면서 담마의 진수를 맛본다. 이전에 보긴 보았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보던 때는 없었다. 마치 진도 나가듯이, 마치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보다가 새겨야 할 내용이 있어서 멈추었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다.

 

 

“신들의 제왕이여, 이 세상에서 수행승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배웁니다. 신들의 제왕이시여, 만약 수행승이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배운다면,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곧바로 아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하여 곧바로 알아서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압니다. 모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나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러한 느낌들에 대하여 무상함을 관찰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며, 소멸을 관찰하며,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듭니다.”(M37)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작은 경(Cūatahāsakhayasutta)’(M37)에서 부처님이 제석천에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되는 구절은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sabbe dhammā nāla abhinivesāyā)”라는 말이다.

 

항상 법사들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집착이다. 집착이 문제라고 말한다. 십이연기에서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한 것이다. 갈애가 더욱더 강화된 것이 집착이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집착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모든 것(sabbe dhamma)’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주석에 따르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말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일이 모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세계를 말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은 집착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집착은 이미 달라 붙어 있어서 뗄레야 뗄 수 없다. 그냥 업의 존재로서 가는 것이다. 세세생생 윤회함을 말한다. 그래서 집착에 대하여 윤회의 땔감이라도도 말한다.

 

집착이 왜 윤회의 땔감일까? 이는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서 설명되어 있다. 윤회의 땔감을 뜻하는 집착은 빠알리어 우빠다나(upādāna)를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음식으로 살아간다. 하루라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런데 음식은 먹는 음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촉식도 있고 의사식도 있고 식식도 있다. 느낌의 식사, 의도의 식사, 분별의 식사도 있는 것이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 어느 여인이 남편에게 아침에 밥상 차려주면서 , 이 밥도둑놈아! 밥만 먹고 사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접촉에 따른 느낌의 식사(촉식)도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네 가지 식사는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네 가지 식사는 윤회의 땔감임을 말한다. 그래서 네 가지 자양분을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우빠다나, 즉 집착이라고 말한다.

 

윤회의 자양분은 집착이다. 마치 불이 타는데 연료와 같고 땔감과도 같다. 만일 연료가 다 타고 없다면 어떻게 될까? 불은 꺼질 것이다. 그래서 기름과 심지를 조건으로 등불이 켜지면 그 기름과 심지가 소모되어 연료가 떨어지면 불이 꺼진다.”(S22.88)라고 했다. 이것이 열반이다.

 

윤회의 땔감이 소모되면 열반에 이른다. 이는 네 가지 자양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윤회의 동력이 되는 연료가 소모되어 다시 태어남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윤회의 땔감은 갈애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다.

 

음식, 촉식, 의사식, 식식과 같은 자양분은 갈애에 따른 것이다.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것은 갈애가 있기 때문이다. 접촉하고자 하는 것도 갈애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하는 것도 갈애에 의한다. 알고자 하는 것도 갈애가 우선한다. 이렇게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 즉 윤회의 땔감이 생겨난다.

 

부처님은 집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했다. 이를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모든 법들은 집착할 것이 못된다.”라고 번역했다. 새기고 새겨 두어야 할 말이다. 빠알리어로 새기면 더 좋을 것이다.

 

빠알리어 삽베 담마 날랑 아비니베사야 (sabbe dhammā nāla abhinivesāyā)”집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또는 모든 법들은 집착할 것이 못된다.”라고 번역된다. 여기서 ‘nāla‘not enough’의 뜻이고, abhinivesa‘inclination; tendency’의 뜻이다. 이는 모든 법은 의향이 있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아비니베사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집착으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 집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집착은 윤회의 땔감으로서 세세생생 윤회하게 하는 연료가 된다. 세세생생 윤회하고 싶거든 네 가지 식사를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열심히 먹고(음식), 열심히 접촉하고(촉식), 열심히 의도하고(의사식), 열심히 분별(식식)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세상에 집착할 만한 것에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모든 것에 대하여 곧바로 아는 것입니다.”(M37)라고 했다. 집착이 집착인 줄 안다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어떤 행위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러한 느낌들에 대하여 무상함을 관찰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며, 소멸을 관찰하며, 보내버림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M37)라고 말했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 가면 지도법사가 늘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십시오.”라는 말이다. 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했을까? 그것은 느낌단계가 윤회의 출구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십이연기 연결고리에서 느낌 단계를 알아차리면 더 이상 연기가 회전되지 않아서 윤회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부처님은 느낌단계에서 세 가지를 알아차리라고 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한다. 부처님은 이 세 가지 느낌을 관찰하라고 했다. 관찰하라고 말한 것은 사띠하라거나 알아차려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갈애는 느낌을 조건으로 한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다. 집착은 갈애를 조건으로 한다.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갈애도 집착도 일어나지 않는다. 연기가 회전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세 가지 느낌에 대하여 관찰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느낌들에 대하여 무상함을 관찰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며, 소멸을 관찰하며, 보내버림을 관찰”(M37)하라고 했다. 이렇게 관찰하면 집착할 일이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윤회의 동력이 되는 땔감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작은 경은 집착, 갈애, 느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세 가지는 조건적으로 발생한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된다. 그런데 갈애와 집착의 원인이 되는 것은 느낌이라는 사실이다.

 

느낌을 관찰하면 갈애는 부수어지고, 갈애가 부수어지면 집착도 부수어진다. 윤회의 땔감이 사라지는 것이다. 어쩌면 부처님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것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은 즐거운 느낌인 줄 알고, 괴로운 느낌은 괴로운 느낌인 줄 알면 그만이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갈애도 있을 수 없고 집착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완전한 열반에 듭니다.”(M37)라고 했다.

 

집착이 없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했다. 윤회의 땔감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때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열반에 든다고 했다. 결국 갈애를 부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신들의 제왕이여, 간략하게 말해서 이렇게 하면 수행승은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신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됩니다.(M37)라고 말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갈애를 부수어야 한다. 갈애가 부수어지면 집착이 없게 된다. 그런데 갈애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면 부수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연기가 회전하지 않게 됨을 말한다. 열반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에 대하여 윤회의 출구라고 한다.

 

열반은 어떤 상태를 말할까? 말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러가지 비유로 열반을 설명했다. 또한 상수멸(想受滅)의 상태가 열반이고,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광의의 열반에 대해서도 말씀했다. 그것은 평화이다. 마음의 평화를 이룬 자는 열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accantayogakkhemī)”(M37)라고 했다. 마음의 평화가 열반인 것이다. 결국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yogakkhema)’이 열반인 것이다.

 

 

2022-04-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