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윤회한다고 하는데
잠에서 깼다. 몇시인지 모른다. 멍때리기 하며 앉아 있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입을 벌려 암송했다.
경을 암송하고 나면 집중이 된다. 정신을 하나로 모으지 않으면 암송할 수 없다. 암송에 집중하다 보면 다음 구절이 자동으로 떠 오른다. 어떤 긴 길이의 경도 암송할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염불일 것이다.
집중된 힘을 내버려 둘 수 없다. 행선을 하는 것이다. 좁은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6단계 행선을 해야 하지만 찰나멸(刹那滅)에 마음을 두었다. 발을 떼는 순간 "짝"하고 소리가 나는데 이는 찰나멸을 관찰하기에 좋다.
모든 것이 찰나멸이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다. 그런데 생겨나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냥 사라질 뿐이다. 찰나멸이다.
발을 떼어서 밀고 바닥에 딛는다. 여기에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무심코 하는 일은 없다. 발을 뗄 때 "짝"하고 소리가 난다. 조건발생하여 그냥 소멸하는 것이다. 이를 아는 마음도 소멸한다. 이를 조건발생의 법칙, 즉 연기법이라고 한다. 빠띳짜사뭅빠다(paṭiccasamuppāda)를 말한다.
지금 시각은 몇 시일까? 행선을 마치고 스마트폰을 봤다. 새벽 4시이다. 명상하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사유하기에도 좋은 시간이다. 아침 6시까지 어떻게 보내야 할까? 글쓰기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스마트폰 메모앱에 있는 자판을 엄지로 치기 시작했다.
요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머리맡의 맛지마니까야를 말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담마를 재발견하게 된다. 이전에는 필요한 부분만 읽었다. 방대한 경은 다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경전은 소설 읽듯이 처음부터 보아야 한다. 각주까지 꼼꼼히 읽어 보아야 한다. 읽었으면 새겨야 한다. 그래서 노랑형광메모리펜을 쓴다. 경전에 글을 쓰면 낙서가 된다. 그러나 칠하는 것은 예외이다. 새겨야 할 부위는 덧칠 해서 강조한다. 이번에도 그런 구절이 있었다.
니까야, 즉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세상에 궁금한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세상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지적도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윤회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윤회를 끝내고자 할 것이다. 세세생생 윤회하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삶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하여 또다시 똑같은 상황을 반복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이번 생 한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나 내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마치 알콜 중독자가 술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윤회하는 것일까? 마음이 윤회하는 것일까? 오온에서 마음, 즉 식(識)이 윤회하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를 보니 그렇게 믿고 있는 수행승이 있었다.
수행승 싸띠가 있었다. 그는 식이 윤회한다고 믿고 있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식이 윤회한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를 참다 보지 못한 동료수행승들이 부처님에게 알렸다.
부처님은 싸띠 수행승을 호출했다. 호출해서 물어보았다. 싸띠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나무랐다.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의식도 조건적으로 함께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이해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낳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M38)
부처님도 욕을 했다 부처님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욕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에 있듯이 "이 어리석은 자여!"라는 말이다. 빨리어로는 '모가뿌리사(moghapurisa)'이다.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수행승 싸띠는 부처님에게 욕을 얻어먹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오온에서 식, 즉 빈냐나(viññāṇa)가 윤회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한국불교에서도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소소영영한 그 무엇이 있다고 말한다. 석가도 모르고 가섭도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도 모르는 그것은 무엇일까? 아마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일 것이다. 힌두교의 아뜨만 같은 것이다. 놀랍게도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 중에도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맛지마니까야 38번 경에 등장하는 싸띠 수행승을 말한다.
식이 윤회한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 가르침은 성립되지 않는다. 오온에서 식이 윤회한다고 했을 때 연기법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식이 윤회한다면 의식(식)은 조건이 되지 않고 연기법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식은 무엇일까? 오온에서 식은 분별식이다. 분별하는 마음 또는 식별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는 식별을 뜻하는 빠알리어 빈냐나(viññāṇa)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오온에서 빈냐나는 의식으로 번역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알음알이로 번역했다. 그런데 빈냐나는 잘게 쪼개서 안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분별식 또는 식별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분별식이 윤회할까?
초기경전을 읽다 보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빈냐나(식)가 분별식 또는 식별식인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43번 경이 그것이다. 가르침의 장군 사리뿟따 존자는 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벗이여, '식별하여 안다, 식별하여 안다.'라고 하므로 벗이여,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M43)
이것이 식에 대한 정의이다. 식 또는 의식을 뜻하는 오온에서 빈냐나는 분별식 또는 식별식인 것이다. 이는 대상을 단지 아는 것과 다르다.
대상을 아는 것은 지각(saññā)이다. 개념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빈냐나)은 다르다. 분별해서 아는 것이다. 빈냐나에서 'vi'는 '나누어서 자른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식은 어떤 고정된 마음이 아니다. 조건 발생하는 마음이다. 조건발생하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찰라멸이다. 그런 마음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체계적이라는 사실이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기계장치와도 같다.
경에서 식이 윤회한다는 것에 대해서 도처에서 반박하는 논리가 등장한다. 맛지마니까야를 부분적으로 읽으면 발견할 수 없다. 처음부터 소설 읽듯이 차례로 읽을 때 발견하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윤회의 주체는 없다. 식이 윤회한다는 것은 힌두교적 발상이다. 어떤 변치 않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가 있어서 윤회한다고 보는 사견(邪見)이다. 싸띠 수행승이 그랬다. 그래서 "모가뿌리사(이 어리석은 자여!)"라며 욕을 들었다.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어리석은 자이다. 마음(식)은 분별식이다. 이런 식이 어떻게 윤회할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르거나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오온에서 의식(빈냐나)은 수(웨다나)와 상(산냐)과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느낀 것을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의식한다."(M43)라고 말한다. 수와 상과 식이 결합되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분별해서 알게 된다. 이것이 식 또는 의식이다. 이와 같은 식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식이 왜 알아차림인가? 이는 앞서 사리뿟따 존자가 식에 대해서 " '식별하여 안다.'라고 하므로 벗이여,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M43)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식별하여 안다'는 말은 비자나띠(vijānati)를 말한다. 식을 뜻하는 빈냐나(viññāṇa)의 어원적 동사이다. 그래서 식은 분별해서 아는 것인데 이를 알아차림으로 보는 것이다.
단순히 아는 것과 알아차리는 것은 다르다. 아는 것은 지각에 대한 것으로 개념적으로 아는 산냐를 말한다. 오온에서 상(想)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알아차림은 분별해서 아는 것이다. 오온에서 식(識)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분별해서 알아차리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식을 뜻하는 빈냐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어떤 지혜인가? 그것은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런 식이 어떻게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은 “어부의 아들 수행승 싸띠는 커다란 갈애의 그물, 갈애의 족쇄에 사로잡혀 있다.”(M36)라고 말했다.
마음이 윤회하고 믿고 있다면 이는 영원주의에 해당된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고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는 견해를 말한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견해의 그물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물코를 가진 그물에 갇힌 채 그물에 조여 발버둥치게 될 뿐이다.”(D1.142)라고 했다. 한국불교가 그런 것은 아닐까?
윤회에 주체는 없다. 있다면 연기의 회전만 있을 뿐이다. 맛지마니까야 43번 경에서 꼿띠따 존자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벗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하게 됩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사리뿟따 존자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벗이여, 뭇삶들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 여기 저기 환락을 즐기며 이와 같이 미래에 다시 태어나 윤회하게 됩니다."(M43)
사리뿟따 존자는 윤회하는 원인을 무명과 갈애로 보았다. 사성제를 모르면 윤회하고, 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면 윤회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연기의 회전에 따른 것이다.
십이연기의 고리에서 윤회의 주체는 없다. 모두 조건 발생이다. 마음이 윤회한다면 이는 조건발생이 아니기 때문에 연기법에 어긋난다. 연기법이 아닌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윤회하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업(kamma)이 윤회한다.
입태할 때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암수의 결합, 적당한 시기,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생명현상으로서의 의식이다. 이를 경에서는 간답바(gandhabba)라고 한다.
간답바는 윤회의 주체가 아니다. 어떤 영혼이 있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식이 윤회하는 것과 같다. 이는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에 위배된다. 그래서 주석가들은 간답바에 대하여 '업의 힘에 의해 태어날 준비된 존재'로 보았다.
업이 윤회한다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른바 업자성정견 (kammassakatādiṭṭhi)을 말한다. 이는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M13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고 성향이 천차만별인 것은 업생(業生)이기 때문이다. 조건발생하는 연기에 따라 업이 윤회하기 때문이다. 십이연기의 고리에 주체가 없듯이 윤회에도 주체가 없다.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그 행위에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게 되어 있다.
새벽에 깨어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행선하면서 찰나멸을 보고자 했다. 새벽 4시 부터 엄지로 치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 6시 24분이다. 2시간 이상 쉬지 않고 엄지치기 했다.
날이 훤히 밝았다. 오늘도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 쓴 것에 대한 제목을 무엇으로 해야 할까?
2022-05-04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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